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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organism 미생물과 유명한 과학자들
2013-09-30 13:17:12

레벤후크

ⓒScience Times

(정성옥의 마법의 탄환을 찾아서)

 

필자가 프랑스에서 유학중일 때였다. 하루는 한 프랑스인이 찾아와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가자며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영문을 몰라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동양사람 특히 한국 사람들은 모두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아들이 운동하다가 다쳤으니 침을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침을 놓을 줄 모른다고 하자 그는 아주 낙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요즘 서양인들은 조그만 바늘이 보여주는 침술의 신비한 능력에 크게 매료되어 있다. 운동을 하다가 다리나 손을 삐었을 때 서양 의사들은 깁스를 해주고 2~3달 치료하는 것이 보통인데 조그마한 침을 며칠만 맞으면 감쪽같이 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의 차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지난 1994년 한약 조제권 문제로 약사와 한의사 간에 일었던 ‘한약분쟁’은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분야 중 어느 분야가 낫다고 단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서양의학과 우리의학〉

서양에서는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시대의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인체해부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에 이미 몇몇 의학자들은 내장기관을 포함하여 뇌와 신경계통에 이르기까지 대한 상당한 해부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대의학을 집대성한 갈레노스도 이러한 해부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인체에 관한 종합적인 이론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 현대 의학의 선구자 윌리엄 하비-윌리엄 하비는 혈관을 통해 혈액을 외부에서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그림은 하비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실린 삽화다. ⓒ


현대 과학을 실질적으로 이끈 서양사의 맥락에서 볼 때 의학의 혁명은 보통 윌리엄 하비(1576~1657)가 혈액의 순환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건을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피가 심장에서 온몸으로 뿜어져 나갔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윌리엄 하비 이전까지는 피가 간에서 새어나와 알려지지 않은 힘에 의해 몸속으로 이동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비는 양의 목 동맥을 잘라서 피가 솟아나오는 모습을 보고 피가 간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비는 동물과 인간의 한시도 쉬지 않는 근육 덩어리, 즉 심장이 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도 발견했다.


하비는 죽은 사람의 심장을 해부해서 심장에 약 3/4㎗(작은 컵 한잔 분량)의 피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심장은 수축할 때마다 70㎤의 피를 몸으로 밀어 보내며 1분에 보통 70번에서 80번 박동한다. 이를 단순 계산법으로 적용하면 1분에 5ℓ의 피, 1시간에 300ℓ가 넘는 피를 내보낸다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수치는 성인 남자 몸무게의 2배에 해당하는 양으로 인간의 몸이 이렇게 많은 피를 매일 생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비는 피가 연속적으로 순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동물의 심장을 당시 광산에서 사용하던 펌프와 같다고 생각했다. 인체란 다름 아닌 펌프로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일종의 기계 장치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기계가 고장이 나면 고장 난 부분만 고치면 된다. 보다 철저한 치료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을 절개하고 장기 관찰을 통하여 어느 부분이 고장 났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차후에 같은 병을 앓는 병자를 치료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서양의 현대 의학은 바로 이런 전제 아래 크게 발달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각종 질병은 인체를 보다 정확히 파악한 후 과학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약품을 사용하면 치료가 된다고 생각했다. 질병의 원인을 국소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치료제도 질병이 있는 부분에만 적합한 것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한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다른 질병에 걸릴 위험성이 항상 존재했다.


반면에 전통 한의학은 인간을 기계로 보지 않고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기(氣)를 중요시하여 기가 빠진 사람은 비록 살아 있다 해도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특히 죽은 사람은 기가 빠진 사람이므로 기가 빠진 사람의 육체는 기가 충만한 사람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장기도 죽은 사람의 것과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다르다고 본다. 동양 의학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을 절개하고 해부하여 장기를 들여다본들 그곳에서 얻는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동양 의학은 서양처럼 자연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에 가치를 두기보다 자연에 동화되고 순응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냇물이 흘러 강물이 되고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이 우리 인체도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이 소화기를 거치고 다시 장을 거쳐 항문으로 배출되는 순차적인 과정이 잘 이루어지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여겼다.


더구나 경험을 중요시하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발전한 것이 한의학으로, 조화를 제일로 중시했다. 우주를 음양오행의 원리로 파악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몸을 작은 우주로 보아 음양의 편차가 없이 균등할 때 건강하다고 보았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조화를 이룰 때 인체가 건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동양 의학이 좋으냐 서양의학이 더 좋으냐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양약은 무조건 나쁘며 한약이 무조건 좋다는 것도 아니다. 양약이 탁월한 효과를 보는 분야는 양약을 사용하고 한약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는 한약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람은 외국 사람들보다 행복한 편이다. 외국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한의학을 가까이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이 있다>

서양의학은 일반적으로 특정 질병에 걸릴 경우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수술 등 치료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양약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특정 질병에 맞는 특정 약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질병에 대한 지식이 쌓여있어야 한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 학자들이 신종 질병이 태어날 때마다 신약 개발에 총력전을 벌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상 예로부터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고 장수하면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을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남부럽지 않게 쓸 수 있는 재산이 있으면 더 좋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아마도 거의 모두 건강을 선택할 것이다. 재산은 모두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한 번 망친 건강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는 동안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의학에 따르면 여하튼 기가 원활치 않아 생긴 것이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기를 충만하게 회복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걸린 병을 곧바로 치료하는 약이야말로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수없는 병을 곧바로 낳게 만드는 특효약이 마법사의 주문처럼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인간의 장점이 나타난다.


원하는 특효약을 개발하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고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 하지만 이를 자신의 직분이자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하튼 특정 질병에 대한 약의 효용이 검증되면서 인간은 보다 원대한 꿈을 꾼다. 한 마디로 어떤 질병이 발생했을 때 단 한 번의 복용으로 질병을 완치시키는 약을 개발하는 것이다. 물론 단 하나의 약으로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이런 꿈을 포기할리 만무다.


근래 인간에게 질병을 안기는 요인은 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300여 년 전의 조그마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현미경의 발명이었다. 3백 년 전만해도 인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질병을 일으킨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현미경이라는 기상천외한 물건이 개발된 후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생물에 대한 정보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대한 연구가 되기도 하고 미생물에 대한 퇴치방안 연구의 시작이기도 하다. 사실상 현대 의학은 미생물의 사냥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들을 토대로 ‘마법의 탄환’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마법의 탄환’이 개발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10회에 걸쳐 설명한다.


<미생물이 보인다>

17세기만 해도 작은 곤충이 가장 작은 생명체로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생명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의 안톤 반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는 확대경이라고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발명하고 웅덩이에 고인 물방울 속에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생명체를 최초로 관찰하여 인간들이 모르는 새롭고 신비로운 세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의 작은 현미경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혜택을 주었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벤후크가 현미경을 발견할 당시의 유럽인들은 미신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거의 없었고 자신의 무지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해부했다가 화형에 처해졌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 처해져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고 선서했을 정도였다.


이 글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자료를 참조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폴 드 크루이프의 글을 많이 인용하였음을 적는다.

 

▲ 뢰벤후크 ⓒ


레벤후크는 네덜란드의 텔포트의 매우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매우 존경을 받는 양조업을 했지만 레벤후크는 열여섯 살 때 암스테르담에 있는 포목상의 견습생이 되었고 스물한 살 때 결혼하고 자기 소유의 포목점을 열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두 명의 부인이 있었고 몇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대부분 사망했다고 한다. 그동안 그는 텔포트 시청의 관리가 되었고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안경제조업자로부터 렌즈 연마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웠다.


그는 렌즈 연마에 대한 기본 원리를 파악하고 난 뒤에도 당대에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선배들의 렌즈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자신이 최고의 렌즈 기술자가 되지 않으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이웃들은 그러한 레벤후크를 약간은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렌즈 연마기술을 익혀 드디어 두께가 30밀리미터가 되는 렌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렌즈를 만들고 난 후 이웃 사람들의 조롱에 대해 자신이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며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제가 그들을 용서해야죠.”


그는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그때까지 어느 인간들도 보지 못하던 세계를 혼자서 보았다. 현미경을 조작하면서 그는 가느다란 곤충의 털이 거대하고 거친 통나무로 변신하는 것을 보았다. 조그마한 파리의 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뚜렷한 세부구조를 보고 불가능의 세계가 있다고 인식했다.


더욱이 레벤후크는 어떤 사람보다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도 한두 번 관찰한 것으로는 확신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비교 검토하기 위해 더 많은 현미경을 만들어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그는 수많은 현미경을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그 숫자는 무려 400여 개가 된다. 현미경의 확대율은 40∼270배 정도로 그다지 나쁜 성능은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신중한 사람인지는 그의 말로도 알 수 있다.

 

▲ 훅의 현미경-훅은 레벤후크가 제조법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현미경을 만들어 결국 레벤후크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


“현미경으로 처음 관찰하는 사람들은 지금은 이것을, 다음에는 저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노련한 관찰자라도 바보짓을 하기 쉽지요. 저는 하나를 관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들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성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합니다.”

 

자신에 차 있는 레벤후크의 말이다. 그는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던 보통 사람들보다는 연구에 관한 한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 사람의 평균 연령보다 무려 두 배에 가까울 정도로 오랜 나이, 무려 91살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레벤후크는 꿋꿋하게 자신이 발명한 현미경을 통해 모든 사물들의 새로운 세상을 관찰하는 데만 무려 20년을 투입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동안 단 한 편의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벤후크는 20여 년이 지나서야 라이너 드 그라프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했다. 그는 사람의 난소에서 발견한 것을 <영국왕립협회>에 보고함으로써 객원회원이 된 사람이다. 드 그라프는 레벤후크가 보여준 현미경과 그가 연구한 자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서둘러 영국왕립협회에 편지를 보내 레벤후크의 발견에 대해 발표하게 해 달라고 주선했다. 레벤후크는 왕립협회의 발표 요청을 받고 「레벤후크 씨가 만든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 : 곰팡이, 피부, 살, 벌의 침 따위」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제목으로 발표하겠다고 대답했다.


네덜란드의 시골 촌뜨기가 영국왕립협회에서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권위와 도도함으로 악명 높은 영국왕립협회회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협회는 레벤후크에게 지속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고 레벤후크는 그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무려 50여 년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수백 통의 편지로 제출했다.


<확인에 철저한 레벤후크>

 

▲ 훅이 발견한 세포-훅은 코르크의 작은 구멍을 세포라고 불렀다. ⓒ


레벤후크는 현미경을 통해서 세상 어디에서나 수많은 괴상한 괴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빗물 속에도 괴상한 괴물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동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크기가 작았다. 게다가 빗물 속에서 보이는 동물이 한 종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다리를 가진 것이 민첩하게 움직이기도 했고 멈추어 서기도 했고 회전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집념이 강한 사람으로 우선 그 동물들이 얼마나 작은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작은 동물들의 크기를 잴 수 있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에 그런 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제일 작은 동물은 큰 이의 눈보다 천 배가량 작다고 말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의 관찰이 옳았다고 설명한다. 적어도 천 배 차이가 나는 것을 레벤후크가 정확히 알았다는 것은 레벤후크가 수많은 실험과 검증을 거쳐 확인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레벤후크는 빗물 속에 사는 이상스럽게 생긴 작은 동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지 땅 속에서 나와 보이지 않게 토기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하느님이 갑자기 만든 것일까. 17세기 네덜란드인답게 그는 경건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빗물 통에서 살게 하려고 작은 동물들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미경으로 얻은 지식을 통해 생명체는 생명체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추측은 그에게 금물이었다. 당연히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는 실험을 계속했다. 레벤후크가 얼마나 놀라운 실험을 했는지는 다음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나는 포도주잔을 깨끗하게 씻어서 말린 다음 지붕 아래 홈통 밑에 대고 물을 받았다. 이 물을 현미경으로 보았더니 그곳에 작은 동물들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레벤후크는 금방 내린 빗물 속에도 작은 동물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동물들이 홈통 속에서 살고 있다가 빗물에 씻겨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쪽에 파란 유약이 칠해진 커다란 도자기 접시를 깨끗하게 씻은 다음, 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가 접시를 큰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더 깨끗한 물을 받기 위해 첫 번째 빗물은 버린 후 신중하게 관찰했다.

놀랍게도 방금 내린 빗물 속에는 작은 동물이 하나도 없었다. 결론은 그 작은 동물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뢰벤후크 현미경 ⓒ


그런데 나흘 째 되는 날 물 속에는 작은 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본 믿기지 않는 사실에 놀랐지만 자신의 상식이 틀렸다고 해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성질이 급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작은 동물들을 기르는 멋진 방법을 발견한 후 영국왕립학회에 편지를 보냈다.


‘작은 동물 100만 마리를 모래알 하나에 넣을 수 있고 번식이 아주 잘 되는 후추 물 한 방울에는 270만 마리가 넘는 작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레벤후크는 왕립협회 사람들이 작은 동물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레벤후크가 자신이 발명한 현미경을 어느 누구에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지만 자신의 발견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학자들에게는 자신이 발명한 작은 현미경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러나 레벤후크는 사람들이 더 잘 보기 위해서 현미경을 만지기라도 하면 당장 나가라고 호통 쳤다.


그는 자신이 만든 현미경들을 고가로 판매해달라는 제안도 거절했다. 다른 사람들이 현미경을 만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레벤후크의 실수였다. 당대의 과학자들은 현미경의 원리를 유도해 낸 후 현미경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훅의 원리’로 유명한 로버트 훅이다.


1677년 로버트 훅은 레벤후크의 거절로 그의 현미경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현미경을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레벤후크의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로버트 훅의 현미경은 레벤후크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레벤후크는 왕립협회의 특별회원으로 추대되었다.

 

▲ 정자 사진-정자를 발견한 레벤후크는 정자 속에 태아의 축소형이 있어 자궁 속에서 껍질을 벗고 그대로 큰다고 믿었다. ⓒ


레벤후크의 현미경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강타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현미경을 보기 위해 델프트까지 여행했다. 러시아의 피터 대제가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수많은 왕후장상들이 그의 현미경을 직접 보기위해 델프트를 방문했다. 레벤후크의 탐구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작은 물고기의 꼬리를 관찰하여 인류역사상 최초로 동맥에서 정맥으로 연결되는 모세혈관을 관찰했다. 그는 사람의 정자도 발견했다.


그러나 레벤후크는 미생물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미생물들이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는 작은 괴물들이 자신들보다 더 큰 생물을 먹어 치우거나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발견했다. 그는 단 한 명의 제자도 키우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레벤후크는 자신이 제자들을 키우지 않은 이유를 당당하게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에게 밝혔다.

 

“저는 한 사람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한 사람을 가르치면 다른 사람들도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는 예속된 상태가 될 겁니다. 전 자유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루이 파스퇴르 2005.05.09 ⓒScience Times


<빗나간 연구가 행운의 실마리>

 

▲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 ⓒ


현미경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하며 과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는가는 레벤후크가 자신이 직접 만든 현미경으로 바구미와 벼룩의 생태 주기를 밝혀냄으로써 바구미와 벼룩이 밀밭과 진흙에서 ‘저절로 발생한다’는 중세 이론의 토대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미생물이 병을 일으킨다는 전염 이론은 레벤후크로부터 200년이 지나야 했다.

근대 개념으로 볼 때 세균학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한 사람은 바로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이다. 파스퇴르는 현대 과학의 세균학, 즉 질병과 미생물을 최초로 명확하게 연결시켜 질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학설을 완성하였다.


원래 화학을 전공한 파스퇴르는 초기에는 식초, 포도주, 맥주 등의 발효라는 실용적인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수많은 질병과 맞서 싸우는 쪽으로 연구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닭의 콜레라를 일으키는 생물을 분리한 후 처음으로 백신을 개발했다. 그 후 탄저병을 공략하였고 광견병 백신도 개발하였다. 생리?의학 분야에서 파스퇴르의 활약이 너무나 두드러져서 사실상 그가 그 많은 연구를 정말로 혼자 했는지 조차 의문이 들 정도이다.


현대적 외과수술은 파스퇴르 덕택에 감염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시술되고 있으며 파스퇴르의 연구 결과인 항생제는 세균의 감염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바이러스성 질병에 대한 예방주사도 상당 부분이 파스퇴르의 공로이며 우리가 마시는 맥주, 포도주는 물론 우유 또는 가공 식품들까지도 상당 부분을 그의 ‘저온살균법’에 빚지고 있다.

 

▲ 파스퇴르 연구소 앞에 있는 파스퇴르의 동상 ⓒ


파스퇴르는 1822년 프랑스 쥐라에 있는 돌(Do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르 브와는 무두장이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우드레서 백작의 농노였다. 그는 상류층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자금이 초기부터 많이 드는 과학에 열중하지 못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은 주위로부터 상당한 자질로 인정받을 정도였는데 그는 학업성적도 좋아 1843년에 프랑스 명문의 하나인 파리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에 진학하여 물리와 화학을 전공했다. 1847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849년부터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화학 조교수를 하면서 화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1854년 릴 대학의 화학 교수 겸 이학부장에 취임하고 화학 분석을 전공으로 1857년에는 라세미산(酸)과 주석산의 결정체를 연구했다. 이 두 개의 산은 오래된 포도주 통이나 물기가 마른 종 모양의 화학 실험용 유리그릇의 침전물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질이다. 이 두 개의 염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동일하며 같은 화학 성분, 같은 결정 구조를 갖고 있지만 단 한 가지의 차이를 보이는데 주석산의 염이 광선의 우측에서 편극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계속 연구하여 ‘좌선성(左旋性)’과 ‘우선성(右旋性)’으로 결정이 구분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결정체가 완전히 용해되었을 경우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좌?우 대칭적인 두 형태로 원자의 배열 즉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발견은 분자 구조의 배열이 어떻게 화합물의 성질에 영향을 주는가를 다루는 입체화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파스퇴르는 그 비밀을 풀자 “모든 것이 밝혀졌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연구를 이어가는 동안 파스퇴르는 부가적으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여러 가지 화학적 방법을 통해서 몇 가지 물질을 이중 대칭구조로 변화시키려고 연구하던 중, 암모니아수의 주석산염을 효모균으로 발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발효를 활발하게 일으키는 물질은 어떤 대칭구조에 특별한 친화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스퇴르는 ‘유기질’,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조직에 의해 생산되는 모든 화학 물질의 대부분이 비대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분자의 비대칭이 생명의 본질과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당시에 주장되던 생기론과 잘 들어맞았다.


파스퇴르는 상상력을 비약시켜 실험실에서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역사 이래 실험실에서 단 한 번도 유기분자를 합성시키지 못한 이유는 바로 생명은 태양의 선광(旋光)이나 양극을 가진 지구 자기(磁氣)같은 ‘비대칭적인 우주의 힘’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야 하는데 대칭적인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고 파스퇴르는 추측했다.

 

▲ 파스퇴르가 실제로 사용했던 백조목 플라스크 ⓒ


곧이어 파스퇴르는 화학 반응에 비대칭적인 힘을 적용함으로써 유기물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태양과 같은 속도로 회전하는 거울을 이용해서 ‘역태양광’으로 식물을 싹트고 자라게 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파스퇴르는 자신이 엄청난 발견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이한 실험을 되풀이한다. 그의 실험 내용을 알고 있는 부인도 파스퇴르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올해 루이가 시도하고 있는 실험이 성공한다면 뉴턴이나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가 탄생할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는 완전히 길을 잘못 들었고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서 그가 좌절했다면 오늘날의 파스퇴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스퇴르가 비대칭 연구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효모균이라든가 곰팡이 같은 미생물을 연구하면서였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연구가 실패로 판명되면 다시는 그 연구를 생각하기도 싫어져 팽개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자신의 연구가 실패했음에도 자신을 낙담하게 만든 미생물에 대해서는 애착을 갖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점이 파스퇴르가 다른 학자들과는 다른 점이다.


여하튼 그는 30년 후에 자신이 처음에 대 발견했다고 좋아했던 연구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자인한다. 그 발언을 할 당시 그의 과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이미 오도된 길이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된 더 큰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그 실수를 만회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발효의 원인은 미생물>

릴 대학교에서 파스퇴르는 화학에서 미생물로 전공을 바꾸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시도한다. 릴의 관리와 사탕무 증류업자들이 그를 찾아와 ‘릴이란 도시에서 원하는 것은 과학과 산업이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이라며 파스퇴르에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연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사탕무에서 설탕을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알코올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원했다. 그들이 파스퇴르에게 연구해 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발효에 문제가 생겨 하루에 수천 프랑씩 손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는 즉시 사탕무에서 증류 알코올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갔다. 그는 문제가 있는 양조통을 검사한 후 끈적끈적한 덩어리를 실험실로 갖고 왔다. 또한 알코올을 잘 만들고 있는 건강한 거품이 이는 통의 사탕무 덩어리도 가져왔다.


그는 현미경 관찰을 통해 건강한 통 속의 물질에서 어떤 결정보다도 훨씬 작은 둥근 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노르스름한 빛깔이었고 내부는 움직이는 이상한 작은 반점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무리지어 있었고 어떤 것들은 사슬 모양을 했으며 놀랍게도 어떤 것들은 측면에서 이상한 싹이 나오고 있었다. 작은 씨앗에서 끝없이 싹이 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1871년 파스퇴르의 맥주제조 특허-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은 근대 식품 가공 및 저장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


파스퇴르는 그보다 약 20년 앞선 1837년에 캉나르 드 라 투르가 양조장의 맥주통을 연구하면서 자라는 효모가 없으면 호프 열매와 보리를 달인 물이 맥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표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드 라 투르는 맥주양조과정에서 보리를 알코올로 바꾸는 것은 틀림없이 살아 있는 미생물이라고 선언했는데 그의 연구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파스퇴르는 드 라 투르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한 후 왜 다른 통에서는 알코올을 정상적으로 만들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병에는 작은 회색 점들이 붙어 있었고 건강한 병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곳에는 효모가 없는 대신에 색다르고 이상한 무언가가 있었다. 작은 막대기 모양의 물체가 거대하게 엉겨 붙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효모보다 훨씬 더 작아 겨우 12만 5000분의 1인치였다.


파스퇴르는 막대기들이 떼 지어 있는 병든 통의 즙은 젖산을 항상 포함하고 있지만 알코올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작은 막대기들이 살아 있으며 젖산을 만든 것은 그들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막대기들이 효모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효모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추정했다. 수없는 실험을 거친 그는 자신 있게 양조업자에게 알코올의 발효를 망치는 것은 작은 막대기라고 연구결과를 알려주고 그들을 막는 방법을 제시했다. 작은 막대기가 통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막으면 알코올을 정상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스퇴르의 효모 발견의 중요성은 발효의 진짜 원인이 살아 있는 생물, 즉 살아 있는 작은 미생물이라고 확인했다는 점이다. 파스퇴르가 미생물에 대한 연구를 죽을 때까지 끌고 가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발효에 관해서는 세 가지 이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화학분야의 왕자요 교황으로 군림하던 독일의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는 발효란 순전히 화학 반응으로 효모균은 효소의 부산물일 뿐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리비히는 알부민이 설탕을 가져가 쪼개서 알코올을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파스퇴르의 생각에 반대했다. 반면에 베르틀로는 효모균이 발효를 일으키는 화학 물질을 분비한다고 주장했고 마지막으로 독일인 의사인 테오도어 슈반(Theodor Schwann)은 생체론적 개념으로 발효는 생물체가 활동하는 부산물로 효모균은 발효하기 쉬운 물질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한다고 주장했다.


슈반은 고기를 충분하게 가열해서 깨끗한 병에 넣고 빨갛게 달구어진 파이프를 통과한 공기가 들어가게 하면 고기는 몇 달 동안 완벽하게 신선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마개를 제거한 후 보통 공기가 들어가게 하면 하루나 이틀 후에 작은 동물들이 증식하며 고기가 상한다고 주장했다. 고기를 상하게 하는 것은 작은 동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스퇴르는 슈반의 생체론적 개념에 동조하며 지치지 않는 실험을 통해 리비히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충분한 설탕만 있으면 효모는 3개월 동안 혹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수많은 양의 프랑스 포도주와 독일 맥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미세한 작은 생물들이 쉬지 않고 일해서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 상품이라고 할 정도로 포도주는 프랑스에서 중요한 생산품이었다. 포도주의 생성 원인을 규명한 파스퇴르는 곧바로 영웅이 되었다. 그의 회원 입회를 거절했던 과학협회는 그에게 생리학상을 수여했다. 그가 콧대 높은 독일인 리비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1895년에 파스퇴르가 죽자 1897년 부흐너는 효모균에서 추출한 효소로 생체 외에서의 발효에 도전장을 던져 자신의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 연구로 부흐너는 190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결론적으로 파스퇴르는 오류를 범했고 베르틀로에게 패배했다는 뜻이다. 리비히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화학적 과정으로서 살아 있는 효모에 의해 자연스럽게 분비된 효소를 인공적으로 공급할 수만 있다면 발효를 위해 생물체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는 파스퇴르의 이러한 오류가 지금까지도 사장되지 않고 오히려 리비히나 베르틀로보다 더욱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파스퇴르의 이론이 완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는 것은 완전치 않은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가 세운 이론을 통해서 그 후에 이루어진 업적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에 대한 연구 분야를 학문의 중요 분야로 이끌었음은 물론 곧바로 인간의 질병을 예방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시켰다. 파스퇴르 만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행운이 연속된 위대한 과학자 파스퇴르>

 

▲ 아리스토텔레스-중세시대까지 인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검증하려는 노력으로부터 현대과학이 태어났다는 설명도 있다. ⓒ


파스퇴르는 과학사상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하나인 생명체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다는 학설을 통쾌하게 깨부수어 더욱 유명인사가 된다. 고대인들은 번식용 수컷이나 알 없이도 흙이라든가 진흙, 습한 물질은 물론 부패에 의해서 수많은 작은 동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생물은 그들이 살던 자연환경에서 태어난다고 믿었다. 자연 발생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의 하나가 뱀장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식기나 알이 있는 뱀장어가 발견된 적이 없으며, 또한 해부를 해서 알이 빠져 나오는 관이 발견된 뱀장어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액이나 알 그리고 알이 나오는 통로가 없는 뱀장어는 진흙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뱀장어가 먼 바다에서 짝짓기 하는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사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꼭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야말로 인간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를 과학적인 사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모든 가설은 직관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므로 후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이유는 그의 이론을 깨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고통의 길을 걸었고 결국 그 해답을 얻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손들에게 숙제를 내주고 그 답을 능력껏 찾으라는 선생님과 같다. 선생님이 정답을 알려주었지만 학생들은 그 정답이 참이라고 믿지 않고 다른 정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무려 2000년이 지나서이지만 2천년이란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난 세월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의사이자 시인인 프란시스코 레디는 1668년 매우 중요한 실험을 했다. 그는 혈액 순환 시스템을 발견한 영국인 의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가 쓴 책에서 곤충이나 지렁이 같은 벌레나 개구리가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씨나 알로부터 생긴다고 추측했음을 알고 최초의 생물학적 대조 실험에 착수했다.


그는 여러 개의 플라스크를 준비하여 여러 종류의 고기를 담은 뒤 반은 밀폐시키고 반은 개봉한 채로 두었다. 그 결과 모든 플라스크의 내용물이 부패했으나 파리가 자유로이 날라 다녔던 마개가 열린 플라스크에서만 구더기들이 생김을 알았다. 그러나 레디는 구더기가 고기에 넣은 파리 알에서 생긴다는 옳은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구더기 이외의 다른 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발생이론이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실험으로 자연 발생론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 간에 자연발생론에 대한 검증 작업과 비판이 이루어 졌으나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자연발생론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니덤이 구더기가 아니라 극미동물이 자연적으로 생긴다고 발표한 것이 또 다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니덤은 쇠고기 국물이 든 유리병의 마개를 막고 30분간 가열하여 멸균했는데도 극미동물을 발견했으며 이것이 자연발생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당시 양식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많은 동물들이 부모가 필요 없이 태어난다고 믿었다. 작은 동물들은 아마도 구역질나게 불결한 혼란 속에서 태어난 불행한 사생아들일 거라도 믿었다. 예를 들어 한 떼의 꿀벌을 얻는 확실한 방법은 이랬다. 어린 황소를 머리를 쳐서 죽인 다음에 뿔이 튀어나오도록 서 있는 자세로 땅 속에 묻는다. 한 달 동안 그대로 둔 후에 뿔을 톱질하면 꿀벌 떼가 나온다. 심지어 영국의 자연주의자 로스는 이렇게 발표했다.


‘딱정벌레나 장수말벌이 소똥에서 생긴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이성, 감성, 그리고 경험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 라자로 스팔란자니-스팔란자니는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을 증명하여 파스퇴르의 승리에 기여했다. ⓒ


1770년 파비아 대학의 라자로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는 우연히 프란체스코 레디의 작은 책 한 권을 보았다. 이 책은 왜 가장 지적인 사람들조차 부패한 고기에서 구더기와 파리가 생길 수 있다고 믿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스팔란차니는 책을 읽은 후 상상력을 보다 키워서 생각했다. 당시 모든 대학교수들이 파리는 알에서 나와야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은 스스로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진실한 참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 스팔란차니는 영국의 존 (John Needham)니덤이 죽은 물체로부터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스팔란차니는 작은 동물들이 쇠고기 국물에서 자연적으로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니덤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되자 자신이 니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팔란차니는 니덤이 의심할 여지없이 병을 충분히 오랫동안 가열하지 않았고 또 뚜껑을 충분히 단단하게 막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 요컨대 니덤은 플라스크 속의 미생물을 완전히 죽이지도 못했으며 새로운 미생물이 플라스크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스팔란차니는 수많은 실험을 통해 유리 자체를 녹여 플라스크를 밀봉한 채 실험을 했더니 미생물이 생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덤은 스팔란차니의 주장에 반발하여 스팔란차니가 실험에서 과도하게 가열함으로써 미생물뿐만 아니라 플라스크 안에 든 혼합물의 발아력, 즉 생장에너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스팔란차니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덤의 이야기대로라면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를 자라게 한 것도 생장에너지이고 겨울에는 벌레였다가 여름이 되면 생장 에너지의 힘으로 나무로 변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스팔란차니는 끓인 혼합물을 다시 공기 중에 노출시킴으로써 얼마나 오랫동안 높은 온도로 가열하는 가에는 상관없이 미생물이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아무리 작은 동물이라도 항상 살아 있는 동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때 드 소쉬르가 놀라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현미경으로 작은 동물들의 증식 습성을 날카롭게 관찰한 후 두 마리의 작은 동물이 같이 붙어 있다고 해도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쌍을 이루고 있는 작은 동물들은 하나의 동물이고 하나의 작은 동물은 두 개의 새로운 동물로 분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미생물들이 증식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드 소쉬르의 논문을 읽은 스팔란차니도 현미경으로 드 소쉬르의 발견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으로 작은 동물 하나를 떼어냈고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작은 공처럼 생긴 작은 동물의 중간 부분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마침내 두 부분이 거미줄처럼 가늘게 붙어 있다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나갔다. 하나의 작은 동물이 두 개의 완벽한 작은 동물이 된 것이다.


그것들은 부모보다 약간 작았지만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더욱 스팔란차니를 놀라게 한 것은 처음에 하나였다가 두 개가 된 자녀들이 2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분열하는 것이다. 하나였던 것이 이제 네 개가 된 것이다.


이것으로 자연발생론은 사망했을 것 같았지만 프랑스의 루앙 민속박물관장인 푸셰가 『자연발생 혹은 자연발생론』이라는 책을 출간하자 논쟁이 재연된다. 푸셰는 밀폐된 용기 안에 용액을 넣으면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스파란차니의 연구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경우 그와 같은 실험을 했는데도 미생물이 번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작은 동물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푸셰가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자 이번에는 파스퇴르가 푸셰에 대항하기 위해 나섰다. 파스퇴르는 유명한 백조목(이중으로 구부러진 관(Swan-necked))이 달린 새로운 구조의 플라스크를 만들었는데 어떤 관은 끝이 완전히 밀폐되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열려 있지만 둘 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실험은 파스퇴르의 승리로 끝났다. 파스퇴르는 공기와 먼지가 없는 곳에서는 미생물이 번식하지 않지만 반대의 경우는 미생물이 항상 번식하고 공기의 양에 따라 그 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증명해 보였다.


푸셰가 이 실험에 승복하지 않자 파스퇴르는 그의 비밀을 알아낸다. 푸셰는 주위의 공기가 아니라 플라스크를 밀봉하는 데 쓰이는 수은을 가지고 고의로 실험용액을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파스퇴르의 성가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논쟁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진다.


“생명이 씨앗이고 씨앗이 곧 생명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주장인 자연발생이론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파스퇴르는 과학사에서 중요한 한 장을 장식한다. 그것은 엄격한 실험을 통하여 뿌리 깊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자들은 파스퇴르가 기본적으로는 옳았지만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박테리아들은 펄펄 끓는 온도에서도 살아남기 때문이다. 푸셰는 계속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지만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아이러니가 생긴다. 파스퇴르에게는 행운이었지만 과학적인 진실로 보면 불행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둘 다 모두 맞았기 때문이다. 몇 년 후 영국인 존 틴들(John Tyndall)은 건초 속에는 여러 시간을 끓여도 죽지 않는 완강한 미생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파스퇴르로 하여금 유명한 언쟁을 끝내게 한 당사자가 바로 존 틴들이었다. 그가 파스퇴르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파스퇴르가 공개 실험에서 펄펄 끓는 온도에서도 살 수 있는 박테리아를 가열했다면 그는 완전히 매장 당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자연발생론이 기승을 부려 과학의 발전은 그만큼 퇴보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이런 면을 볼 때 파스퇴르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공개실험 때 그가 승리한 것은 인류를 보아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파스퇴르의 이론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틀렸지만 그의 불완전한 실험 자체는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현대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파스퇴르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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