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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organism 로베르트 코흐와 파스퇴르 콜레라균의 발견
2013-09-30 13:20:00

로베르트 코흐와 파스퇴르

Science Times 

<콜레라균의 발견>

▲ 연구실의 파스퇴르 ⓒ

인류가 세균을 비롯한 미생물의 정체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콜레라가 인류를 강타했다.콜레라는 1563년 가르시아(D’Orta Garcia, 1501?1568)가 쓴 『콜로퀴오』에서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했는데 그는 인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질병을 콜레라(Cholera morbus)라고 명명했다. 그 후 약 200년이 지난 1768년, 콜레라는 인도에서부터 전파되어 서서히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예병일은 적었다. 
1883년에 인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이집트에 침입하고 더 나아가 남유럽 항구를 강타하자 그는 곧바로 제자와 함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당시에 콜레라는 매우 위험한 전염병으로 파스퇴르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파견한 제자 튜이리에가 콜레라에 걸려 죽을 정도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파스퇴르의 제자도 도착하여 콜레라균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코흐도, 파스퇴르도 콜레라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콜레라균을 발견하기 위해 콜레라가 번창하는 인도로 자원했다. 
인도에서 콜레라 환자가 많이 발생한 이유는 근대화로 인하여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가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인도에서의 콜레라는 1817년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시작하여 동남아시아로 퍼졌고 1820년에는 중국과 필리핀, 순조 21년(1821)에는 조선에까지 상륙하였다. 1826년에 시작한 2차 유행은 유럽 상륙에도 성공하였고 1840년에 시작한 3차 유행에서는 프랑스에서 14만 명, 영국에서 2만 명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위력을 보였다. 

여하튼 코흐의 용감한 행동은 보상을 받았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콜레라균을 발견하고 육즙 젤리를 사용하여 순수 배양에도 성공했다. 또 콜레라가 더러워진 옷이나 물에 의해 전염되는 경로를 명확히 밝힌 후 다음과 같이 콜레라 퇴치 방법을 말했다.

▲ 선페스트균-선페스트는 여러 번 인류를 강타했는데 특히 1346년에 서유럽에서 발생한 선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1/4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

‘콜레라는 절대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콤마균을 삼키지 않는다면 건강한 어떤 사람도 콜레라에 걸리지 않는다. 또한 그 균은 같은 종류의 균에서 증식하며 다른 물질이나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콜레라균은 사람의 장이나 인도에서와 같이 아주 오염이 심하게 된 물에서만 자란다.’ 
그의 발견으로 무서운 콜레라균은 더 이상 위험의 대상이 아니었다. 1884년 독일로 돌아온 코흐는 개선장군과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 개념을 창안한 코흐에게도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그는 죽은 결핵균에서 투베르쿨린이라는 백신을 만들었다고 1890년에 발표했다. 그의 발표를 듣고 모두들 결핵을 원천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환호성은 대단했다. 이 당시 유럽에서 병사하는 사람의 7분의 1이 결핵이었으니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결핵은 원래 감염자의 몸이 약해지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감염자의 5-15%만 발병한다. 평소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하는 사람은 결핵에 걸릴 위험이 낮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투베르쿨린 치료법은 결핵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치료법으로 죽은 후의 일이었다. 
결국 당대의 슈퍼스타인 코흐는 잠정기간 은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891년 코흐는 그를 위해 설립된 <베를린전염병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으나 투베르쿨린의 실수로 한동안 연구는 답보한다. 또한 50세의 코흐가 18세의 젊은 여배우 프라이베르그와 재혼한 후에 또다시 구설수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코흐는 1896년부터 다시 학문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지만 투베르쿨린이 결핵의 치료제라고 발표했던 실수 때문에 노벨상 제1회 수상자의 영광을 제자인 베링에게 빼앗긴다. 노벨상을 제자에게 빼앗긴 코흐는 좌절하지 않고 1903년에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수면병, 페스트 등을 연구했고 1904년에는 아프리카 회귀열 등을 연구했다. 결국 1905년 결핵에 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 제1회 1901년 노벨상 수상자 에밀 베링 우표 ⓒ

코흐의 제자인 베링이 코흐보다 먼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가 함은 노벨 생리·의학상 100년 역사상 유일하게 스승보다 제자가 먼저 받은 상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특히 코흐가 1905년에 노벨상을 받은 업적은 1880년대에 이미 발표된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을 감안할 때 제자에게 첫 노벨상을 양보해야만 한 것이 얼마나 그에게 그를 안타깝게 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에서 각각 한차례씩 제자가 스승을 앞선 기록이 있다.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 1901?1976)는 1954년 노벨상을 수상한 보른(Max Born, 1882?1970)의 제자이며 19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피셔(Hermann Emil Fisher, 1852?1919)도 1905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베이어(Adolf Baeyer, 1835?1917)의 제자이다. 
여하튼 코흐는 노벨상을 제자에게 먼저 양보해야 할 정도로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망신을 준 결핵을 지구상에서 퇴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핵균을 퇴치하겠다는 코흐의 장담은 달성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야심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그가 약하게 만든 세균은 이른바 패치 테스트(약제를 바른 천이나 종이를 붙여 피부의 알레르기 반응을 알아보는 실험)의 주성분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결핵균 감염 여부를 확인할 때 투베르쿨린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코흐와 결혼한 프라이베르그는 코흐가 1910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의 곁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그가 소장으로 근무하던 <베를린전염병연구소>는 1912년 <로베르트코흐연구소>로 개명되었다. 연구에는 철저하여 많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고통 아닌 고통을 준 코흐였지만 자신의 칭송자들에게는 항상 겸손했다. 
“나는 힘껏 싸웠습니다. 그 성과가 내가 노력한 이상의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내리친 망치가 부닥친 부분에 우연히 금광이 있었는데 불과합니다.” 
<특정 병인론>코흐(Robert Koch)에 의해 확립된 세균학이란 특정 질병은 특정 균에 의해 발병한다는 ‘특정병인론’이다. 예를 들면 결핵균이 없으면 결핵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론이지만 파스퇴르와 코흐가 살아있을 당시 만해도 이 이론이 통용되지는 않았다. 심한 과로 상태나 영양결핍이 결핵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다. 
한편 코흐는 특정병인론에 기반하여 세균 조사 원칙을 세웠다. 코흐의 정리로 알려진 이 원칙은 4원칙이라고도 불리며 이후 세균학 발전의 발판이 된다. 
① 특정 질병에는 그 원인이 되는 하나의 생물체가 있다.② 그 생물을 순수 배양으로 얻을 수 있다.③ 배양한 세균을 실험동물에 투입했을 때 똑같은 질병을 유발시켜야 한다. 예컨대 분리 배양한 결핵균은 실험동물에 주입했을 때 결핵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④ 그 병에 걸린 실험동물에서 다시 그 세균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코흐의 정리는 곧바로 학자들에게 도입되어 수많은 질병과 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정병인론’은 논리적으로 ‘특효요법’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특정 원인에 의해 특정 병이 생기므로 그 특정 원인을 제거하거나 교정한다면 특별한 효과가 있다는 치료법이다. 학자들은 제일 먼저 세균을 확인한 후 그 다음 과제로 환자를 다치지 않고 세균만 죽이는 약을 발견하는데 치중하였다. 

이런 효과가 있는 치료약을 ‘마법의 탄환’이라고 불렀다. 병과 그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적군이라고 할 때, 아군인 우리 몸에는 아무런 해나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여 특정한 적군만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이로서 특정 세균에 대한 특정 화학치료법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으며 약학이 마침내 20세기 의학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코흐의 공리 전개도-코흐의 공리는 어떤 질병의 원인균을 확인하는 원칙으로 마법의 탄환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토대를 제시했다 ⓒ

물론 코흐의 업적은 코흐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우선 코흐의 4원칙은 원래 독창적인 그의 것이 아니다. 대학 시절 그의 스승이자 미생물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동기가 되었던 『전염병은 살아 있는 작은 기생충에 의해 발생한다』라는 책을 발간했던 헨레(Jacob Henle, 1809~1885)가 특정 생물이 특정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했던 세 가지 조건을 좀 더 명확히 한 것에 불과하다. 헨레의 세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특정 질병에는 기생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2. 이 기생균을 다른 생명체로부터 분리해야 한다.3. 분리된 기생균이 똑같은 질병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코흐의 4원칙을 비롯하여 그가 행한 여러 실험방법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반복되어 검증되면서 당시까지 모르고 있던 여러 가지 전염병에 대한 각각의 원인균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견된 여러 병원균, 즉 임균, 단독균, 스피로헤타균, 재귀열균, 나균 등 각 병원균의 발견의 공로는 각 개인에게 주어졌지만 이들의 업적도 코흐의 영향으로 이루어지거나 코흐에게 빚진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코흐가 인류에 미친 영향은 바로 이것으로 그는 ‘세균학의 개조(開祖)’라는 칭호를 받는다. 
특히 뒤에서 설명하는 살바르산 606,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 각종 세균성 전염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 약이 궁극적으로 개발될 수 있었던 것도 코흐의 병인론과 질병관의 귀결이자 소산으로 여긴다. 
코흐는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를리히와 1901년 제1회 노벨상을 수상한 베링도 그의 제자였다. 피비거도 1926년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화학 물질 발암설을 증명한 야마기와도 그의 제자였다. 뢰플러, 화이퍼는 디프테리아균, 화이퍼균을 발견했고 이 외에도 수많은 코흐의 제자들이 세균학을 발전시키는데 여러 공헌을 했다. 전 세계에서 발행된 우표에 가장 많은 얼굴을 내민 의학자가 바로 코흐라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코흐의 또 다른 업적은 병원균을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매개하는 곤충을 박멸하는 것도 전염병을 퇴치하는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을 학자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는 페스트가 쥐에 붙어 있는 벼룩이 매개하여 사람에게 전염되고 또 수면병이 체체파리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그래쇼와 영국의 로스에 의해 말라리아가 모기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도 발견되었다. 코흐는 무서운 전염병을 막는 방법 중에 하나가 이들 곤충을 박멸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코흐가 제시한 이 방법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세균이 질병을 예방한다>

▲ 연구실에서의 코흐-코흐는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동안 지칠 줄 모르고 연구에만 전념하여 많은 제자들과 과학자들을 괴롭혔다 ⓒ

코흐와 파스퇴르의 연구 방법은 매우 달랐다. 코흐는 마치 수학 교과서처럼 냉정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는 체계적인 실험으로 결핵균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만한 점을 사전에 모조리 점검했다. 코흐는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것만큼 자신의 실패도 항상 되씹으면서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발견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바라보았고 자신이 얻은 결과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비판적이었다. 그러므로 코흐는 다소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파스퇴르는 머릿속에서 옳은 이론과 다른 추측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열정적인 탐색가였다. 파스퇴르는 마치 섬광이라는 말처럼 우발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쏘아 올렸다.이 당시에 닭콜레라가 프랑스에 번성했다. 인간이 걸리는 콜레라와는 무관하지만 이 병이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90% 이상의 닭이 죽으므로 농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이었다. 건강한 닭이라도 아차 하는 순간에 모두 죽었다. 
파스퇴르는 프랑스 동부 쥐라 산맥에 있던 수의사인 루비에가 발견한 탄저병 치료법에 주목했다. 그 지역 유력인사들이 죽음의 문턱에 있던 수백 마리의 소를 루비에가 치료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루비에의 기적적인 치료법은 다소 복잡했다. 처음에 병든 소를 손으로 마구 문질러 가능한 한 뜨겁게 했다. 그런 후 병든 소의 가죽에 길게 상처를 내고 송진을 부었다. 마지막으로 울부짖는 소를 뜨거운 식초에 담근 이상한 연고로 얼굴만 빼고 전신을 두껍게 바른 후 천으로 덮어 연고가 떨어지지 않게 했다. 파스퇴르는 루비에의 치료법을 공인시키기 위해서는 공개실험을 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그러면서 사전에 예행연습을 했다. 루비에와 파스퇴르는 네 마리의 건강한 소를 데려와 병독성이 강한 탄저균을 주사했다. 다음날 그들은 모든 소들이 탄저병에 걸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루비에는 그 중 두 마리에게 자신이 개발한 탄저병 약을 주사했고 나머지 두 마리는 그대로 방치했다. 
그런데 결론은 루비에의 이야기와 달랐다. 탄저병 약을 주사 맞은 소 중 한 마리는 상태가 좋아졌지만 한 마리는 죽었고 치료를 전혀 받지 않은 소도 한 마리는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좋아졌다. 실험이 실패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탄저병에 걸렸음에도 살아남은 두 마리의 소에 더 강력한 탄저균을 주사했다. 그런 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사한 곳 주위에 적어도 발병의 흔적이라도 생겨야 했는데 소는 멀쩡했다.파스퇴르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소가 한 번 탄저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면 세상 어떤 탄저균도 다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없다. 면역이 생긴 것이다.’ 
파스퇴르에게 다시 목표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죽이지 않을 만큼 안전하게 탄저병에 걸리도록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동물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에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으므로 루비에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실험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파스퇴르는 병에 걸린 수평아리의 벼슬에서 피를 채취해서 닭고기 수프에 넣었다. 수프 속에서 세균은 급속히 번식했다. 그는 세균을 함유하고 있는 수프를 닭에게 주었더니 닭은 곧바로 죽었다. 이것으로 파스퇴르는 무서운 닭콜레라균을 인공적으로 배양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맹독의 배양균을 사용하여 얼마동안 실험하다가 몇 주일 중단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실험하면서 배양균이 들어있던 병을 조사했더니 닭콜레라균이 아직 살아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균을 배양하지 않고 오래된 균을 건강한 닭에게 주사했다. 이것이 파스퇴르로 하여금 의학상 발견 중 가장 큰 업적을 성취하게 만들었다. 
파스퇴르는 쓰다 남은 배양균으로 닭이 처음과 같이 죽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닭은 처음에 병에 걸린 조짐을 보이더니 곧 회복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확실히 맹독성의 배양균이지만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이때 파스퇴르의 위대함이 나타난다. 그는 평소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관찰의 분야에서는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베풀어진다.” 
그는 몇 주일 동안 공기에 노출된 채 방치되었던 배양균이 새로 만든 균과는 달리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확인 작업에 나섰다(파스퇴르 부인이 힌트를 주었다는 설도 있음).닭 콜레라균을 넣은 닭고기 수프를 실온에 방치해 두는 시간을 달리한 다음 각각의 수프를 닭에게 먹여 증세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건강한 닭을 10마리씩 여러 군으로 나누어 1군 10마리에는 금방 만든 닭고기 수프를, 2군 10마리에게는 만든 지 하루가 지난 닭고기 수프, 3군 10마리에게는 만든 지 2일, 4군 10마리에게는 사흘, 5군 10마리에게는 만든 지 나흘이 지난 닭고기 수프를 주었다. 
그 결과 방금 만든 닭고기 수프를 먹은 닭은 닭 콜레라 증세를 보이며 모두 죽었으나 만든 지 여러 날이 지난 수프를 먹은 닭의 치사율은 날짜가 지남에 따라 치사율이 낮아짐을 발견했다고 예병일은 적었다. 결국 닭 콜레라균의 독성을 약하게 만들어 닭에게 주면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자신의 발견에 확신을 얻은 후 제너가 우두에 걸린 사람은 거의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을 상기했다. 그래서 그는 만약 닭에게 가벼운 닭콜레라를 걸리게 하면 회복된 후에는 같은 병에 심하게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파스퇴르는 제너의 아이디어가 자신이 발견한 방법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예방접종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배양균을 백신(vaccine)라 불렀다. 라틴말로 암소를 뜻하는 ‘vacca’에서 딴 것으로 이것은 제너가 우두의 고름을 사용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도 제너와 자신의 발견이 다른 것임을 확실히 했다. 
“저는 제너와는 달리 동물을 죽이는 미생물과 그들을 죽음에서 지켜 내는 게 동일한 미생물이라는 걸 알아내었습니다.” 
제너에 관한 부분은 다음에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자신이 발견한 백신이 다른 전염병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유명한 외과의사인 쥘 게렝(Jules Guerin)은 파스퇴르가 닭을 가지고 소란을 떠는 것을 비판했다. 파스퇴르가 격분해서 게렝의 동물 수술이 엉터리라고 소리치자 여든 살이 넘는 게렝은 자리에서 일어나 파스퇴르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위에 있던 학자들이 싸움을 말려서 1단계는 그런대로 수습되었다. 
그런데 고령의 게렝이 친구를 보내 파스퇴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파스퇴르는 80이나 되는 노인의 결투 신청에 응하여 자신의 임무를 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게렝에게 보냈다.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편집위원들이 비판의 권리와 합법적인 방어를 넘어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파스퇴르는 결투에 응해 만에 하나 죽게 되는 불상사를 슬기롭게 피해나갔다.일부 학자들이 반대한다고 자신이 발견한 위대한 내용을 사장시킬 파스퇴르가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발견을 사람들에게 확인시킬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그에게 그야말로 천운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에 닭콜레라보다 더 유명한 가축병은 탄저병이었다. 탄저병은 가축들에게 생기는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강해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면양과 소, 말들이 죽었다. 일반 농가에서는 이 병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특히 면양을 기르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 병은 동물들의 다리가 약해지고 비틀거리다가 곧바로 죽어버리므로 치료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파스퇴르는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에 있던 세균이 살아 있는 동물에게로 옮겨져 이 병이 퍼지는 것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건강한 동물이 균에 오염된 목초지의 풀을 먹으면 전염된다는 것이다. 
파스퇴르는 탄저병에 대해 연구하면서 시골 농장을 자주 방문했다. 그러다가 그는 실험하고 있는 8마리 양이 있는 농장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양이 있는 울타리 안과 밖에 있는 흙의 색깔이 달랐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험용 양들에게 치명적인 탄저병 배양액을 주사했는데도 몇 마리가 살았다. 주입된 바실루스균의 양을 볼 때 양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땅을 소유한 농부는 파스퇴르에게 전에 탄저병에 걸린 양이 색이 변한 흙이 있는 지역의 땅에 묻혔다고 말했다. 파스퇴르는 그 흙에서 잡은 지렁이를 조사했더니 지렁이 속의 흙에 탄저병 포자가 있었다. 여기에서도 파스퇴르의 위대성이 나타난다. 그는 바실루스균을 맞고도 살아난 양과 바로 이 흙 속의 탄저병 포자를 연결하여 생각한 것이다. 
‘살아 있는 양이 이 격리된 지역의 흙에서 자란 풀을 먹고 덜 치명적인 탄저병 바실루스에 감염되어 이후의 감염에 면역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 
이 때 프랑스의 유명한 농장인 푸이 르 포르(Pouilly le Fort) 지역의 농학회와 수의사가 그의 백신에 대해 실험할 기회를 주선했다. 그런데 이 실험은 수의사인 로스뇰 박사가 파스퇴르를 파멸시키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공개 실험을 요청했다고 폴 드 크루이프는 적었다. 

‘파스퇴르는 양과 소를 탄저병에서 보호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들었다고 공표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탄저병 때문에 1년에 수천만 프랑을 손해 보는 프랑스 농민들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파스퇴르가 정말로 그런 마술과 같은 백신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 파스퇴르연구소에서 개발한 현미경 ⓒ

파스퇴르가 공개 실험에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농부들과 수의사들은 이득을 볼 것이고 만약에 실패한다면 파스퇴르는 자신이 위대한 발견을 했다는 소리를 당장에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발견을 증명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파스퇴르에게 로스뇰 박사의 제안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파스퇴르는 즉각 도전에 응했다.파스퇴르는 1881년 5월, 를룅의 농민협회 참관 하에 푸이 르 포르 농장에서 양 25마리, 암소 5마리, 황소 한 마리, 염소 한 마리에 탄저병 백신을 접종했다. 또 다른 양 25마리, 암소 4마리는 백신을 맞지 않은 채 목장에 풀어놓았다. 12일 후에 백신을 맞은 동물들은 다시 약화된 탄저병 백신을 맞았고 또 다시 2주일 후에 모든 동물에게 맹독의 탄저병균을 주사했다. 
1881년 6월 2일,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고관대작들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실험의 결과가 공개되었는데 이 실험의 결과는 파스퇴르의 예측대로 적중했다. 백신을 접종 받은 동물들은 모두 살았지만 백신을 맞지 않은 양은 3 마리를 제외하고 이미 모두 죽었고 남은 3마리 중 2마리가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검은 피를 입과 코에서 흘리면서 죽는 극적인 장면도 연출되었다. 4마리의 소도 탄저병의 징후를 보였다. 당시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실험에 의해 죽은 양은 한 장소에 묻혔다. 그리고 다시 접종한 면양과 접종받지 않은 면양으로 실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뻔하다. 이제 농업계는 문제의 병의 예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예방법은 비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어쨌든 단 한 사람이 하루에 천 마리의 면양에게 접종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의 공개 실험 이후 2년 동안 10만 마리의 동물이 접종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탄저병으로 죽은 것은 단지 650마리뿐이었다. 그러나 접종 받지 않은 면양은 10만 마리 당 약 9천 마리가 죽었다. 파스퇴르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보면 파스퇴르에게는 운이 따라 다니는 동시에 그 운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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