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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organism 에드워드 제너 <광견병 퇴치의 주인공은 파스퇴르를 위해 자살>
2013-09-30 13:22:17

에드워드 제너

Science Times<광견병 퇴치의 주인공은 파스퇴르를 위해 자살> 
파스퇴르 전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광견병 백신을 개발할 때의 이야기이다. 광견병은 흔한 병은 아니지만 무서운 증세 때문에 매우 잘 알려져 있었다. 광견병은 광견병에 걸린 개나 늑대에게 물린 후 한 달 또는 그 이상이 지나야 나타나는데 그 병은 신경계에 침입해서 불안, 거친 행동, 발작, 마비를 일으키며 100% 사망한다. 환자들이 종종 물을 보고 두려움을 표현해서 공수병(恐水病)으로도 불린다. 당시에는 광견병 환자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고의로 죽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파스퇴르는 미친개를 건강한 개들이 있는 큰 우리에 넣고 다른 개를 물게 만들었다. 또한 미친개의 타액을 주시기로 뽑아 토끼와 기니피그(일명 모르모트)에 주사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엉망이었다. 건강한 네 마리의 개가 미친개에게 물렸는데 두 마리는 공수병에 걸렸지만 나머지 두 마리는 멀쩡했다. 기니피그와 토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공수병에 걸리는 것도 있고 걸리지 않는 것도 있었다. 
파스퇴르는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 올렸다. 

‘공수병균은 물린 상처를 통해서만 사람들의 몸속에 들어가고 뇌와 척수에 자리를 잡는 것 같다. 공수병의 증상을 보면 균이 신경계를 공격하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우리들이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신경에서 그것들을 배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배양액 대신 살아 있는 동물의 뇌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광견병 백신을 접종받는 마이스터와 파스퇴르를 기념하는 우표, 미친개에 물린 마이스터는 파스퇴르의 백신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

놀랍게도 그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학자들은 미생물 사냥과 과학의 역사상 파스퇴르의 이 아이디어처럼 비과학적인 실험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는 닭콜레라와 탄저병 백신을 제조하는 방법을 응용하여 광견병 백신을 만들었다. 그것은 광견병으로 죽은 토끼의 척수를 일부 잘라내 무균상태의 병에 넣어 14일간 말리는 것이다. 
그러나 광견병 백신은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광견병의 경우는 광견병에 걸린 환자에게 실험해야 하는데 그 기회가 도무지 오지 않는 것이다. 파스퇴르가 만든 백신은 검증이 안 되었으므로 위험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1885년에 9살 난 소년에게 자신이 만든 백신을 13회 접종한다. 요셉 마이스터(Joseph Meister)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미친개에게 전신을 14군데나 물려서 의사가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진단하자 부모가 자식이 어차피 죽을지 모르니 파스퇴르의 백신을 실험해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 실험도 대성공을 거두어 파스퇴르는 소년을 살렸다. 
마이스터를 비롯해 1895년 파스퇴르가 사망할 때까지 약 2만 명의 환자가 백신 치료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명 이하였다. 파스퇴르에 의해 광견병 치료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심어졌다. 마이스터는 파스퇴르의 치료를 받고 완치된 후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연구소의 수위로 일했는데 1940년 독일의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후 공들여 제작한 파스퇴르의 지하 묘실을 열라고 명령하자 자살하였다. 
파스퇴르가 운이 좋았다는 것은 당시에 아직 광견병의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것을 몰랐는데도 즉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광견병 백신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사용된 현미경의 배율로는 너무나 작은 바이러스를 관찰할 수 없었다. 바이러스는 1932년 독일의 크놀과 루스카에 의해 발견되었다. 
파스퇴르는 제너의 면역 요법을 모든 일반 병원체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아마비, 독감, 황열병 등 병원체가 발견되지 않은 병도 반드시 병원체가 있다고 믿었으며 백신을 만들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던 중 실제로 광견병 백신 제조에 성공한 것이다. 
파스퇴르와 제너의 백신은 제조 방법이 다르다. 광견병 백신은 광견병에 감염한 환자들로부터 채취한 미지의 병원체를 토끼의 척추에 이식시키고 그것을 건조시켜서 만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실제의 광견병 바이러스보다 약한 독성을 가졌으며 광견에 물려서 잠복기에 있는 동안에 주사하면 항체가 생기므로 본래의 광견병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이다. 
반면에 제너의 종두법은 우두 바이러스의 항체로 천연두의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종이 다른 병원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파스퇴르가 한 방법은 진짜 병원체의 독성을 약하게 한 것을 접종하는 것으로 인체에 강제적으로 항체를 만들게 하고 그것으로 침입한 바이러스를 죽이는 방법이었다. 
파스퇴르는 ‘병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오늘날의 상식이자 과학적인 사고를 확립했다. 이로써 유럽은 중세로부터 이어온 신비주의와 드디어 결별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는 존 시몬즈가 『사이언티스트 100』이라는 책에서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과학자로 뉴턴, 아인슈타인, 보어, 다윈에 이어5번째로 거론했을 정도로 인류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파스퇴르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상은 1901년에 첫 수상자가 배출되었는데, 파스퇴르는 1895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원칙적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수여하지 않으며 그 원칙은 지금까지 특별한 예외(다글러스 함마슐트가 사망한 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음)를 제외하고 지켜지고 있다. 
파스퇴르가 다른 과학자들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생애를 일관했던 실학주의가 실제로 수많은 업적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학교에 성실했던 그는 대학에서 배우고 가르칠 이론이 실제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실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생산자들의 상담에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자문을 받은 내용은 프랑스의 토지나 특성, 농업에 관한 것이 주였지만 자문을 받은 주제를 성실히 파헤치면서 위대한 발견을 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조국이 우선인 파스퇴르와 코흐> 
파스퇴르는 1892년 70세 생일날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아무 쓸모없는 회의론에 빠져 여러분 자신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전 인류에게 닥친 슬픔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낙담하지 않도록 하는 대신에 실험실과 도서관의 고요한 평화 속에서 사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배움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지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점차 발전하면서 조국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물으십시오.” 
파스퇴르의 이러한 연구와 국가관은 당연하게 여러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인 코흐와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학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국이 독일과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1870~71년 프랑스와 프러시아(독일) 간의 전쟁은 비스마르크가 위대한 독일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비스마르크의 기갑부대는 8월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알자스로 진입했고 9월에는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파리를 포위한다. 
그러자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말로 아들과 함께 곧바로 지원병을 자청하여 그가 말뿐인 애국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물론 48세의 나이 때문에 아들만 입대하였지만 그 후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도 연구를 계속했다는 일화도 있다. 
파리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양국 간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자 파스퇴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프랑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사력을 다할 때까지 저항하기를 원한다. 최후의 날까지 나의 모든 노력은 ‘프러시아에 대한 증오, 복수, 복수!’ 라는 비명에 남을 것이다” 

또한 파스퇴르는 1871년 1월, 미생물학에 대한 업적으로 독일 본 대학에서 받은 명예 의학 박사 학위를 돌려주며 “야만과 위선이 프랑스 과학자에게 주입한 분노의 표현으로 당신 대학의 기록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이 학위증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는 양심의 부름에 따른다”고 적었다고 강건일은 설명했다.

▲ 코흐와 제자들, 코흐는 과학자임과 동시에 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로 베링과 에를리히 등 우수한 과학자들이 코흐 연구실에서 연구했다. ⓒ

한편 독일의 전쟁터에는 아직 20대의 결핵균의 발명자로 유명한 코흐가 있었다. 그는 의과 대학을 나와 일하다가 1870년 군에 자원했지만 근시안으로 거절되었다가 징집되어 야전 병원의 군의관으로 몇 달 동안 일하고 있었다. 당대의 최고 학자들인 두 사람은 학회에서 서로 만나기도 했지만 국가관에 관한 한 서로 증오를 감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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