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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organism 지석영과 에밀 베링 실학자들이 먼저 종두법 도입
2013-09-30 14:29:45

지석영과 에밀 베링

Science Times 

<실학자들이 먼저 종두법 도입> 
우리나라의 종두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우리 선조들은 천연두를 ‘마마’라고 불렀다. 상감마마, 중전마마처럼 왕족에게나 사용하는 극존칭을 붙인 까닭은 이런 역병이 발생하는 원인을 알 수 없었으므로 최대한 높임말을 사용함으로써 역신(疫神)의 노여움을 달래려는 의도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종두법이라면 지석영을 떠올리지만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우두종법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정조 때 실학자들에 의해서라고 추측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에 종두변증설(種痘辨證設)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미키는 우리나라에 인두종법을 처음 들여오게 한 사람은 초정(楚亭) 박제가로 보았다. 박제가의 친구인 실학자 정약용도 종두에 관심을 가졌다. 정약용은 자신이 천연두 예방에 관해 습득한 효과와 경험을 기초로 하여 우두 접종법의 발명 경위, 효과, 그리고 접종 방법을 적은 『마과회통』 6권 3책을 저술했을 정도이다. 또한 이종인이 영남에서 끈질기게 종두를 보급시켰으며 1817년 『시종통편』이라는 천연두 치료법을 저술하여 사실상 지석영에 의한 우두종법이 도입되기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인두종법은 시행되고 있었다. 인두종법이란 천연두균을 환자로부터 직접 채취하여 코를 통해 흡입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실학자인 정약용, 박제가가 종두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우리나라에 직접적으로 종두를 보급한 장본인은 역시 지석영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종두에 관한 한 지석영의 업적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 지석영 사진, 지석영은 조선의 천연두 박멸에 힘썼으며 정약용의 저술인 아학편(兒學編)을 한자와 영어로 주석하여 각 한자에 음과 훈을 제시함으로써, 어린이 교육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

지석영은 철종 6년인 1855년 5월 15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빈한한 한방약국(韓方藥局)을 운영하던 지익룡의 막내아들(넷째)로 태어났다. 지석영의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의학에 능통하여 일찍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역관(譯官)을 통해 서양 의학 자료를 접했다. 지석영은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의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개화 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姜瑋)의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다. 
고종 13년(1876)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정부는 그 답례로 그해 6월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여 사절단 일행 75명을 일본에 보냈는데 이 일행 중에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이 있었다. 의무담당 서기로 동행한 박영선은 지석영이 평소부터 우두법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 오다키로부터 우두법을 익히고 일본인 구가가 지은 『종두귀감(種痘龜鑑)』이란 책을 구입하여 귀국하자마자 지석영에게 주었다. 
막상 지석영은 박영선으로부터 우두법에 대한 책을 받았지만, 서양 의학에 기초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고 실험할 수 있는 두균(痘菌)도 얻을 수 없었다. 1879년 부산에 와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 우두가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석영은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고 일본 해군이 부산에 세운 제생의원(濟生醫院)의 마쓰마에 원장으로부터 서양 의학의 기초 지식과 종두법을 익힌 후, 1880년에 서울에 돌아 온 후 곧바로 자신의 집에 종두장을 설치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종두를 실시했다. 
그러나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가져온 두묘만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두를 실시할 수 없으므로 1880년 5월 김홍집 일행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반상전랑청’이란 직함으로 일행 58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지석영은 <동경위생국>의 우두종계 소장 기쿠치로로부터 두묘 제조법과 저장법, 어린 송아지의 사육법 및 두장(痘醬)을 채취하는 방법 등을 습득한 후 귀국했다. 
지석영이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종두장에서 보다 많은 어린아이들에게 우두를 접종하고 있었는데 1887년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한탄하며 조세 등 국정의 잘못에 대해 11개조에 달하는 상소를 했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강진의 신지도로 유배된다. 
1892년에야 귀향에서 풀려났지만 그의 우두에 대한 집념은 한결같아 곧바로 우두보영당을 설립하여 어린아이들에게 종두를 계속 실시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득세하면서 외세에 의한 개화운동이 밀물처럼 휩쓸고 이른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나자 지석영은 관계(官界)로 진출하게 된다. 남달리 그를 아끼던 김홍집은 지석영에게 엉뚱하게도 형조참의로 임명하면서 동학군을 토벌하라고 한다. 
이 당시 일본군들이 경상도 일대에 배치되어 동학군을 토벌하고 있었는데 가을에는 대구감영의 판관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다. 그는 대구에서 일본군의 통역을 맡기도 하면서 동학군이 크게 세력을 떨치는 진주?언양?하동에서 동학군을 크게 물리치는데 이때의 행적이 그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주는 결정적인 빌미가 되어 그 후 계속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특히 2003년 1월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과학기술인들에게는 명예와 자긍심을 심어주고,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초대 헌정자 15인 중에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가 추후에 친일행적 때문에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로 제외되는 비운도 맛보았다. 
여하튼 지석영의 생애는 평탄치 않아 1898년에는 망명 중인 유길준 등과 내응했다는 무고를 받고 황해도 풍천군 초도에 10년 유배형을 받는다. 형지로 떠난 100일 만에 무고함이 밝혀져 사면되기는 했으나 권력에 혐오를 느끼고 그의 나이 고작 43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세력과 결별한다. 
지석영은 관계를 떠난 후에도 학부대신 이도재에게 관립의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1898년 끝내 관철시키는 의지를 보였다. 그의 간청으로 189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의학교인 한성의학교 탄생되며 지석영이 초대 교장이 된다. 
1904년 한성의학교는 대한의원의 의육부로 개편되고 이곳에서 의사는 물론 약제사, 산파 그리고 간호사의 양성을 맡았는데 오늘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병원이 지석영의 뜻을 기리는 뜻으로 연건 캠퍼스의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건물(구 대한의원 본관) 옆에 지석영의 동상을 세우고, 대학로에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석영길’로 명명한 이유이다. 
그러나 지석영은 개인적인 고난과 관계(官界)로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종두의 중요성을 각계에 호소하여 1894년에 우두 접종을 법으로 제정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1895년 10월에는 「종두 규칙」이, 1895년 11월에는 「종두 의사 양성 규정」, 1899년 6월에 「각지방 종두 규칙」, 1899년 9월에 「두창 예방 규칙」을 제정토록 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하는 등 천연두 치료와 예방에 전력을 다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지석영은 일제가 불법으로 조선을 병탄했고 자신이 일제를 위한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인식한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로부터 수많은 공직을 권유받아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았다. 일제가 1928년 ‘조선 종두 도입 50주년’ 기념행사를 펼치면서 지석영을 위대한 선각자로 추켜세우는 등 지석영을 우대하였지만 일제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1935년에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파스퇴르 연구소의 에밀 루 ⓒ

지석영이 살았던 19세기 말은 각종 전염병이 만연하고 위생상태가 낙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천연두나 전염병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두법의 도입과 대중화로 국민 건강에 결정적으로 공헌했으며 과학적 의학과 보건학의 도입을 촉진시켰다. 지석영의 집념으로 국내에 도입된 종두법의 효과가 탁월하지 못했다면 조선에서의 근대의학이 뿌리내리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지막으로 천연두 박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과거에 천연두에 감염된 사람의 치사율이 30퍼센트나 되며 1880년부터 1980년까지 100년간 천연두로 사망한 세계 인구가 5억 명을 상회한다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고 릭 와이스는 적었다. 
<이상한 디프테리아균> 
1880년대에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번지는 디프테리아가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디프테리아에 걸린 10명의 어린아이 중 다섯 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당대의 학자들은 어린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디프테리아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질병인데 이미 1826년에 브레토노(Pierre Bretonneau, 1778?1862)가 디프테리아가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발표했고 1880년대에 후반에 유럽에서 디프테리아가 유행하자 때마침 코흐의 조수인 프리드리히 뢰플러(Friedrich August Johannes Loffler, 1852?1917)가 디프테리아 항독소(Antitoxin)를 발견했다. 
디프테리아균은 아름다운 파란색 점을 가진 줄무늬가 있는 막대기 모양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줄무늬가 있는 미생물을 순수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 균은 목구멍에서만 발견되고 다른 부위에는 없었다. 
베링보다 먼저 코흐의 연구실에서 일했던 뢰플러는 목구멍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는 몇 개 안 되는 균이 어린아이를 그렇게 빨리 죽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순수 배양된 균을 토끼와 기니피그(일명 모르모트)의 피하에 주사했다. 동물들은 2?3일내로 사망했고 어떤 때는 더 빨리 죽었다. 
하지만 뢰플러는 코흐의 조수답게 신중성이 너무 지나쳐 자신이 발견한 간균이 정말로 디프테리아의 원인균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디프테리아로 죽은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균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니피그와 토끼를 병들게 했던 작은 미생물이 디프테리아 증상이 전혀 없는 한 아이의 목구멍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탁월한 예측을 했다. 

‘이 균은 독소를 만드는 것이 틀림없고 균체에서 스며 나와 몸 속의 중요 기관으로 들어간다. 그런 독소는 디프테리아로 죽은 아이의 장기와 기니피그의 시체, 그리고 이 균이 잘 자라는 배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에밀 베링, 코흐의 제자인 베링은 디프테리아의 혈청요법을 개발하여 코흐보다 먼저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뢰플러의 발표에 주목한 사람은 파스퇴르의 조력자인 프랑스인 에밀 루(Emile Roux, 1853?1933)와 코흐의 제자인 독일인 에밀 베링(Emil Adolf von Behring, 1854?1917)이다. 
에밀 루는 디프테리아 환자로부터 뢰플러가 발견했던 것과 같은 균을 발견했다. 그가 균을 배양하여 토끼에게 주사하자 토끼는 며칠 후 뒷다리를 절뚝거리며 끌더니 상체까지 마비된 후 죽었다. 그는 자신이 배양한 균이 디프테리아를 발생시키는 원인균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은 토끼의 조직을 떼어내어 비장과 심장에 배양했는데 균이 자라지 않았다. 수십억 개의 균을 토끼에게 집어넣었는데도 토끼의 몸에서 한 마리의 균도 발견되지 않았다. 
루는 뢰플러가 예측한 내용에 주목했다. 즉 동물들을 마비시키고 죽이는 것은 균이 만드는 독소라는 것이다. 루는 엄청난 실험을 통해 독소를 갖고 있는 균의 특성을 발견했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소량으로도 토끼나 큰 개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순수하게 정제된 물질 1온스는 기니피그 60만 마리 또는 큰 개 7만 5000마리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러나 루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그는 디프테리아균이 어떻게 아이들을 죽이는지는 설명했지만 균의 공격을 막는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 생백신 접종, 미국의 조너스 소크가 자신이 개발한 소아바미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소아마비는 백신을 철저하게 접종하면 천연두와 같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다. ⓒ

루와 똑같은 에밀이라는 이름을 쓰는 베링도 루와 같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링은 파스퇴르의 아이디어 즉 백신을 만드는 방법에 있어 아무리 약한 병원균이라도 인간에게 직접 주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병균이 인체에 일단 침투하면 인체에서 항체를 만들어 대항하는데 병균이 이를 극복할 때에만 질병이 일어난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것은 병균이 인체에서 만드는 항체에 저항하는 물질을 만들기 때문으로 그는 병균이 만드는 저항 물질을 추출하여 주사하면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을 발전시켰다. 
베링은 디프테리아를 치료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찾을 수 있다며 다양한 화학 합성물을 동물들에게 주사했다. 비싼 금도 시도해 보고 나프틸아민도 시도하는 등 30가지가 넘는 물질들을 실험했다. 그런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와 다소 비과학적이고 무작위적인 실험을 통해 요오드 트리클로라이드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치명적인 양의 디프테리아균을 기니피그 피하에 주사했다. 미생물들은 기피니그의 몸속에서 재빨리 증식했고 베링은 요오드 트리클로라이드를 주사했다. 놀랍게도 치명적인 디프테리아균을 주입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니피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치유된 동물들이 디프테리아에 대한 면역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옳았고 몇 십 마리의 동물을 죽이기에 충분한 수백만 마리의 균이 들어있는데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면역을 가진 것이다. 
결국 베링은 디프테리아에 걸렸다가 회복되어 면역을 가진 동물의 혈청만이 디프테리아 독수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런 혈청을 항독소(antitoxin)이라 불렀다.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성능이 좋은 항독소 공장이 설립되었고 3년이 못되어 2만 명의 아기들이 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치료약은 완벽하지 않았다. 
이때 프랑스의 에밀 루가 말들에게 독소에 대한 면역을 갖게 하는 쉬운 방법을 개발했다. 그 혈청은 매우 강력해서 소량으로도 여러 마리의 개를 죽일 수 있는 많은 양의 독소를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밀 루의 혈청도 완벽하지 않았다. 100명 중 26명이 죽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디프테리아 자체에 있었다. 디프테리아는 병독성에서 기복이 있는 질환인 것이다. 심할 때는 100명 중 60명을 죽일 정도로 치명적이지만 어떤 때는 디프테리아균이 약해져 겨우 열 명 정도를 죽였다. 
여하튼 베링과 루의 혈청 치료는 계속 발전하여 병에 걸린 첫날 항독소를 주면 거의 모든 아기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특히 근래에는 몇 번의 간단하고 안전한 주사를 맞기만 하면 그동안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던 디프테리아는 더 이상 치명적인 병이 아니다. 
병에 걸린 환자로부터 채취한 항체를 가지고 있는 혈청을 주사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혈청 요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면역 현상을 이용한 예방 접종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질병의 병원체인 세균에 의해 화학적 유독 물질인 독소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질병의 1차적 원인이 된다. 한편 항원에 감염된 생물체는 항원과 그 독소에 대항하기 위해 항독소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죽은 세균을 몸에 주사하면 가벼운 증상을 일으켜 항독소의 생성을 자극하고, 그 결과 추후의 감염에 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링은 1901년에 코흐를 제치고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그에 대한 노벨상 수여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혈청 요법에 대한 그의 연구, 특히 디프테리아에 대한 혈청 요법의 적용은 의료 과학에서 신천지를 개척한 것이고 인간의 질병과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의사들에게 제공했다.’ 
한마디로 베링이 면역학의 창시자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업적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의 업적은 혈청에서의 항독소의 존재를 규명하고 면역혈청으로 예방과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련의 작업을 완성시킨 것이다. 베링과 함께 일한 에를리히는 항독소의 적정량을 계산하였고 혈청 요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혈청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자 학자들은 혈청의 근원을 캐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성과를 얻은 사람이 벨기에의 세균학자 보르데(Jules Bordet)였다. 그는 혈청이 상호 관련 있는 여러 가지 효소로 구성된 복잡한 체계임이 밝혔다. 이 연구로 보르데는 191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다양한 백신> 
백신이란 일종의 ‘가짜’ 병균이다. 죽거나 기능이 약해진 병균, 또는 그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병균으로서의 자격은 엄밀하게 말하여 미달이다. 그러나 이 병균을 몸에 접종하면 몸은 ‘가짜’ 병균을 ‘진짜’로 알고 방어 체계를 가동시킨다. 그 덕에 나중에 ‘진짜 병균’이 몸에 침투해도 이와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을 ‘약독화 백신’, ‘생(生)백신’ 또는 ‘순화백신(attenuated vaccine)’이라고 한다. 이들은 제조 비용이 적게 들고 보통 한 번 접종으로 면역력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생백신의 경우 병균의 독성을 없앴다고 해서 그 병균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 병균이 맹독성을 다시 얻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또한 생산비가 많이 들고, 효과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불활화 백신(inactivated vaccine)' 또는 ‘사(死)백신(killed vaccine)’ 요법이다. 생백신이 위험하다면 아예 병균을 죽여서 백신을 만들면 안전하다는 것으로 파스퇴르가 사용한 방법이다. 
백신을 제작할 때 포르말린 등의 약품을 이용하여 병원성 미생물을 사멸시키는데 실제로 독감, 콜레라, 백일해, 그리고 광견병 백신은 이런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 소아마비용 백신은 사백신을 활용하는데 그것은 생백신의 부작용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도 초기에는 생백신을 이용해 소아마비를 예방했는데 생백신을 맞은 아이들에게 1년에 5~6건 정도의 부작용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사백신은 생명력이 사라진 병균을 백신으로 만들기 때문에 면역력이 생백신보다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사백신을 사용할 경우 별도의 면역 증강제를 함께 투여해야 한다. 또 면역 효과가 나오기까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단점이다. 
위의 것들보다 나중에 개발된 톡소이드(toxoid)는 병원체가 가지고 있는 독소(toxin)에 열을 가하거나 포르말린 등의 약품을 처리하여 독성은 파괴시키고 독소가 특이하게 지니고 있는 면역원으로서의 성질은 그대로 둔 것이다. 결국 인체에 해는 주지 않고, 면역 반응 등의 인체의 방어 기작은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하여 동일 병원체가 침입했을 때 제거할 수 있도록 한다. 상황에 따라 생백신이나 사백신에 톡소이드의 특성도 부가한 백신도 생산된다. 
학자들은 여기에서 중단하지 않는다. 바로 생백신, 사백신보다 더 안전한 백신의 개발에 투입했는데 바로 단백질 백신이다. 병균의 유전자를 떼어 내어 실험실에서 대량으로 복제한 후 이들로부터 만들어지는 단백질을 백신으로 이용한다는 개념이다. 병균이 몸 속에서 단백질을 만들어 내며 활동한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현재 사용되는 B형 간염 백신이 바로 단백질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단백질 백신은 안정성은 제일 높지만 면역 효과는 떨어진다. 즉 병균에 대한 항체는 만들어 내지만, 세포 속에 숨은 병균을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단백질 백신의 효능을 높이기 위해 연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취학 전 아이들의 예방주사, 학교는 집단생활을 하는 곳이므로 각종 유행성 질병 감염에 대비하여 취학 전에 각종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사진 이은정). ⓒ

일반적으로 신생아에서 노인까지 누구나 10종 이상 백신이 투여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 국에서는 ‘표준백신접종지침’등을 제정해 백신 접종 확대에 노력한 결과, 각종 전염병에 걸릴 확률은 20세기 초에 비해 90%이상 감소했다. 
현재 세계 각 국에서는 국가 주도의 전략적인 백신 접종사업을 통해 디프테리아, 파상풍, 천연두, 소아마비, 홍역, 유행성이하선염, 풍진 등을 유명무실한 질병으로 만들었다. 소아마비의 경우, 미국에서 1950년대엔 한 해 평균 1만 6천여 명이 발병했으나 1955년쯤부터 백신이 보급되어 60년대엔 1,000명 이하로 줄더니 1998년에는 단 한 명도 발병하지 않았다. 홍역도 1960년까지 매년 50만여 명이 발생하여 그 중 400여 명이 사망했지만 1998년에는 겨우 89명이 발병했을 뿐이다. 

물론 근래 전 세계적으로 거의 자취를 감췄던 소아마비가 아프리카 전역, 중동, 남아시아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3년 소아마비는 니제르, 이집트,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6개국에 집중됐는데 타 10여 개 국으로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소아마비가 다시 출현한 인도네시아는 10여 년 전부터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자취를 감춘 국가다.

▲ 영화 「아웃브레이크」, 전염병이 발생하면 지독한 감염인자와 접촉하게 될 현장의 의료 연구진은 철저한 보호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

소아마비가 다시 등장한 것은 2003년 중반 이후 나이지리아 북부 여러 지방에서 백신 캠페인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회교도가 다수인 카노주와 몇몇 주들에서는 ‘예방접종 캠페인이 이슬람교를 말살시키려는 음모며 백신은 불임을 일으키고 백신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들어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예방접종이 중단된 것이다. 
소아마비는 위장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으로 발생하며 사람들 간 전염이 가능하다. 바이러스는 신경세포를 파괴해 치명적인 마비가 일어난다. 현재로서는 치료방법은 없으며 예방만 가능하다. 백신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증거로 자주 제시된다. 
인간의 오묘한 질병 방어 체계를 연구한 현대학자들은 면역능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체는 적군이 침입하면 자동으로 섬멸전을 벌이는 2단계 국방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것을 면역이라고 부른다. 침입자가 독성이 약하거나 소규모인 좀도둑 수준일 때는 1단계 작전으로 충분하다. 모기가 물면 즉시 빨갛게 붓는 것도 모기의 독이라는 좀도둑에 대항하기 위해 면역세포가 밀집한 혈액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런 좀도둑은 이런 정도로도 퇴치가 충분하다. 

침입자가 최소 무장공비 수준이라고 판명되면 인체는 2단계 작전에 돌입한다. 무장공비 세균들은 워낙 독성이 강하거나 병력이 많아 1단계 경찰력을 압도하고, 은신하거나 변장을 거듭해 감시망을 피해 우리 몸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바이러스가 계속 변종을 만드는 것이 변장의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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