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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organism 에를리히와 도마크 <특효약 키니네>
2013-09-30 14:39:28

에를리히와 도마크

Science Times 

<특효약 키니네> 
말라리아에는 키니네라는 특효약이 존재한다. 1500년경 남아메리카의 페루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이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에게 ‘키나’라고 하는 나무의 껍질을 달여 먹이고 완치시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후 1630년경 유럽에 말라리아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신부들은 곧 키나 나무껍질 분말을 유럽에 보냈다. 그러나 유럽의 왕립의과대학 교수들과 의사들은 의학계 전문가도 아닌 신부들이 보낸 약초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키나를 ‘예수회 분말’이라고 이름을 붙여 경멸하고 그 사용과 유통을 방해했다. 심지어 가톨릭 추기경인 루고가 키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널리 보급하려고 했음에도 의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예병일은 적었다. 
1670년대에 영국의 런던과 남부 바닷가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이때 약방에서 조수로 일한 경험이 있는 ‘탈보’란 사람이 키나 분말을 자기가 발명한 말라리아 특효약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복용한 사람들은 백발백중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말라리아 환자에게 키니네를 처방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왕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다. 그는 당장에 탈보를 불러들였고 의사들이 ‘의심스러운 가루’라고 폄하하는 약을 복용한 후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 후 ‘태양왕’이라 불리던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황태자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루이 14세와 친분이 있던 찰스 2세는 탈보를 루이 14세에게 급파했고 황태자는 단시일에 생명을 건졌다. 
탈보는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지만 의학계의 높은 장벽을 깨지 못하고 1681년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그의 비방약이 바로 키나 나무임이 밝혀졌다. 1820년에 프랑스의 젊은 의학도 조셉 펠레티에(Pierre Joseph Pelltier, 1788?1842)와 조셉 카방투(Joseph Caventou, 1795?1877)가 키나 나무에서 키니네(Quinine)란 유기화합물을 추출하였다. 
그 때까지 키나가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의학계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성분과 작용 원리가 밝혀지지 않아 의학계에서 믿을 수 있는 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펠레티에와 카방투가 키나의 비밀을 밝혀내자 비로소 키니네는 전 세계에 보급될 수 있었다. 
키니네는 남아메리카에서 자라는 키나 나무에서 채취한다. 그러므로 말라리아가 각 국에서 창궐하자 키니네는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남미산 키나 나무의 수입이 곤란하게 되자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등에서 본격적으로 키나 나무를 심었고 네델란드는 키나 나무를 독점하여 큰 이득을 보았다. 
<인공적 키니네 합성> 
키나 나무가 일정 지역에서만 자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국제관계를 유발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곤란을 당한 국가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방해로 키니네의 공급이 중단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학자들은 이때의 쓰라린 경험을 알고 있으므로 합성 대체품 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바이엘사에 근무하고 있던 로엘은 카나리아를 이용하여 1924년 키니네보다 60배나 강한 효능을 지닌 파마퀸(pamaquine)이라는 물질을 찾아냈고 1927년부터 플라스코퀸(plasmoguine)이라는 상품명으로 발매했다. 그러나 이 물질은 부작용이 심해서 널리 사용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에 로엘은 계속 연구하여 키나크린(quinacrine)이라고도 불리는 아테브린(atabrine)을 개발했다.

▲ 말라리아 박멸운동 기념우표, 한국이 세계보건기구의 범세계적인 말라리아 박멸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1962년에 발행했다. ⓒ

말라리아는 전염병의 치료에 화학 물질을 사용하여 성공한 최초로 예이다. 사실상 오늘날 유기합성 화학이 다각적인 산업으로 발전한 이유는 천연 키니네가 현저히 부족한데다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독일이 유기합성 분야에 관한 한 세계를 주도했는데, 이런 성과가 없었다면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훨씬 더 치명적인 패배를 맛보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미국도 말라리아로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은 수입을 통하여 키나 나무로부터 키니네를 제조하는데 문제점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처럼 합성 치료약을 개발하였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이 변하는 돌발사고가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미국은 남태평양에 있는 섬들에서 전투를 해야 했는데 이 지역의 키나 나무 재배지는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북아프리카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이탈리아 병사로부터 항말라리아로 여겨지는 환약을 입수했다. 이 약은 아테브린보다 효력이 10배이며 부작용도 적은 클로로킨(chloroquine)이었다. 미국은 곧바로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약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군 당국이 적극적으로 치료약을 보급했지만 병사들이 이를 전혀 복용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유명한 일본의 라디오 선전원 ‘도쿄 로즈’가 미군 병사들에게 지급된 말라리아 치료제를 먹으면 황달처럼 피부색을 누렇게 될 뿐만 아니라 성불구가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옳은 말이지만 성불구가 된다는 말은 틀린 것임에도 병사들이 이 치료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성불구가 된다는데 말라리아 치료제를 복용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미군이 뉴기니아에 상륙했던 2주일 동안에 전 병력의 95%가 말라리아를 앓게 되었지만 치료제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당시 말라리아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가는 말라리아에 걸린 1천 명의 해병대원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인원이, 1천 명이 전사할 경우 수습에 필요한 인원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항말라리아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 약은 수년간 사용하면 약효가 떨어졌다. 이는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중에 이런 약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종류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키니네는 이와 같은 내성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말라리아에 대한 투쟁에서 아직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고 있다. 
<모기 박멸이 관건> 
여름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기를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 모기향이다. 모기향의 원리는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이 모기를 쫓는데 사용하던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시골에서는 여름날 마당에 볏짚을 태워 모기를 쫓곤 한다. 이것은 볏짚에 모기를 없애는 성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기가 연기를 쫓아가는 특성을 이용해 모기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여름에 습도가 높고 무더운 우리나라에서는 창을 열어 바람을 맞는데 모기향은 바로 이런 한국인의 생활 습관을 이용한 것이다. 코일의 끝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우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살충 성분을 계속 공중에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모기향에서 나는 연기는 사람의 눈과 코를 맵게 만든다. 
이런 단점을 없앤 것이 전자모기향(매트)이다. 가열판이 있는 전기장치(훈증기)에 납작한 매트를 넣고 전기로 열을 가해 살충 성분을 기화시켜 파리나 모기를 박멸하는 형태이다. 전자모기향은 모기향처럼 연기를 내지 않는다는 점, 살충 성분을 동일한 비율로 휘발시킨다는 점 때문에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이와는 달리 모기를 원천적으로 박멸하는 살충제가 있다. 미국의 길버트 첸버스와 돈 믹스가 공동 개발한 MLO라는 살충제가 그것이다. 그들은 모기가 얕은 물에서 부화되어 스스로 날기까지는 5일에서 10일 걸린다는 것에 착안하여 모기가 숨을 쉬지 못하도록 호흡 기능을 차단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20도의 수온에서 살충 효과가 가장 강한 MLO는 무색의 액체로 냄새가 거의 없는데 물위에 뿌리면 엷은 막을 이루지만 산소가 뚫고 들어가는 데는 아무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숨을 쉬는 데는 이상이 없지만 모기 유충이 물위로 떠올라 공기를 마실 때 함께 마시면 100% 질식해 죽고 마는 것이다. 
1973년 캘리포니아에서 MLO에 의한 대대적인 살포 작업이 전개되었다. 기존의 약은 1주일 밖에 효과가 없었는데, MLO는 2주일 동안 모기가 얼씬하지 못하면서도 공해가 없어 모기약 살포에 따른 경비가 50%나 절감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2004년 KBS-TV에서 「환경스페셜」이란 다큐멘터리가 시리즈물로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한 마을의 주민전체가 모기떼에 견디다 못해 통째로 이사를 해야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 모기유충을 찾아 나선 송사리, 송사리나 미꾸라지가 먹어치우는 모기유충은 마을을 모기의 피해로부터 구해줄 수 있을 만큼 많다. ⓒ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는 것도 유분수지 어떻게 마을 주민 전체를 이사 가게 할 정도로 극성이었을까 의아스럽지만 문제의 발단은 모기유충을 잡아먹는 천적인 송사리들이 그 지역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에 보면 말이 모기떼지 하루아침에 마당에 쌓여 있는 모기떼들의 주검이 조그만 동산을 이룰 정도라고까지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 극성이 어느 정도인가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말라리아가 거의 사라졌는데 그것은 말라리아의 원흉인 모기 박멸에 비교적 환경단체 등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모기의 천적을 이용하는데 그 주인공은 미꾸라지이다. 경기도 고양시, 안산시, 성남시 등 많은 자치단체에서 2000년 초부터 미꾸라지를 이용해 모기를 잡고 있다. 
미꾸라지는 한 마리당 하루 1000마리의 모기유충(장구벌레)를 잡아먹는다. 모기는 고여 있는 물에 알을 낳고 성충이 되기까지 7~14일간 유충으로 지내기 때문에 모기박멸 효과가 매우 높은데다가 하천 수질정화도 꾀할 수 있는 다목적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미꾸라지는 하천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습성이 있어 산소가 부족하기 쉬운 하천에 산소를 공급하는 등 하천수질을 정화하는 효과도 있다. 
말라리아를 박멸하기 위해 사용되는 살충제가 새나 타 동물에 해를 끼치므로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환경 단체도 있으나 살충제를 사용함으로써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의 인명을 생각하면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그들은 역사상에 기록된 모든 전쟁에 의한 사망자의 수보다 말라리아에 의한 사망자수가 더 많다고 지적한다. 물론 송사리를 키우면 될 것이라고 하겠지만 어느 곳에서나 송사리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창과 방패의 사용 문제는 필자가 이곳에서 거론할 문제가 아니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모기를 박멸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감염성 미생물들이 모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기의 바늘은 희생자의 방어 메커니즘이 자신들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직접 혈액 속으로 감염성 미생물들을 전달시키는데 적격이라는 점이다. 

말라리아, 황열, 뎅기열, 뇌염과 같은 A급 질병을 비롯해서 100여 가지의 치명적인 병들이 모두 모기에 물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행하게도 에이즈를 옮겨주는 바이러스(HIV)는 적어도 지금까지 모기에 의해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기가 빨아드리는 바이러스는 모기 자신의 대사 과정에서 녹아버린다. 만약 바이러스가 그런 재난을 피해가는 방법을 강구하기만 하면 인간은 보다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빌 브라이슨은 적었다.

▲ 진토닉(사진 namhealan), 토닉(tonic)은 키니네 성분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진토닉을 마시면 말라리아에 잘 걸리지 않아 인도 정복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를 덜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영국이 인도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인이 진토닉을 마신다는 습관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처음에는 영국인들도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았으나 이상하게 술을 잘 마시는 장병들은 말라리아에 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토닉(tonic)이 키니네 성분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진토닉을 마시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자 진토닉이 치료제로 대량으로 소비되는 덕분에 영국인은 말라리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통치를 당하는 인도인들의 대부분은 이 영국 음료의 냄새를 싫어해 말라리아로 고생했다. 
<마법의 탄환 등장> 
마법의 탄환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세계 각지에서 벌렸지만 궁극적으로 최초의 마법의 탄환을 개발했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이다. 그도 다른 학자들과 같이 코흐의 정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세포에는 손상을 주는 일 없이, 인체에 침입한 세균만 죽이려는 특효약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6백 번이 넘는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1910년 매독 치료에 특효가 있는 ‘살바르산 606(살바르산은 안전한 비소라는 뜻이며 606이라는 숫자는 606번째로 얻어진 물질이라는 뜻한다)’을 개발한 것이다. 
에를리히는 매우 쾌활한 사람으로 하루에 25개의 시가를 피웠고 같은 연구실의 연구원들과 맥주 마시기를 좋아했다. 그는 현대적인 사람이지만 미생물을 쏠 수 있는 마법의 탄환은 존재한다고 살바르산 606호를 개발하기 전에 공언하면서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유명한 에를리히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그의 경쟁자들은 그를 ‘공상과학자’라는 표제로 풍자하는 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그러나 에를리히가 의학 개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마법의 탄환을 만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살인자가 즐겨 쓰던 독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약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매독을 일으키는 나선형의 미생물(스피로헤타 팔리다)을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는 비소를 이용해서 퇴치했다.

▲ 독일 지폐의 에를리히 ⓒ

에를리히는 철저한 과학자적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리에 맞지 않으며 비과학적인 생각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에를리히로 하여금 미생물 사냥에서 성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1854년 3월 독일의 슐레지엔에서 태어난 에를리히는 브레슬라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문학 선생님이 그에게 ‘인생은 꿈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써오게 했다. 그러자 총명한 에를리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작성하여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인생은 산화작용에 달려 있다. 꿈이란 뇌의 활동이고 뇌의 활동이란 단지 산화작용이다.’ 

그런 총명함은 문학 선생님을 화나게 했고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군데의 의과대학을 다닌 평범한 의대생인 에를리히에 대한 교수들의 평가도 형편없는 학생이었다. 그것은 에를리히가 병든 환자를 치료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수만 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폴 드 크루이프는 적었다. 
그는 교수가 시신을 해부해서 몸의 각 부분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러자 에를리히는 시신의 한 부분을 아주 얇게 잘라 놀랍도록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아닐린 염료로 염색했다. 그는 염료를 사기도 했지만, 대담하게 교수의 코 앞에서 훔치기도 했다. 교수들이 그런 그를 예뻐할 리 만무했다. 
여하튼 에를리히는 전통적인 교수법을 싫어했다. 에를리히는 코흐보다 열 살 아래였다. 그런데 코흐가 처음으로 탄저균의 존재를 증명하던 바로 그 날 그는 콘하임의 실험실에 있었고 코흐의 설명을 들었고 곧바로 코흐의 숭배자가 되었다. 추후에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자 코흐를 찾아가 미생물 사냥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에를리히는 의사였지만 마음이 연약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의 비명소리나 치료받지 못한 환자의 죽음에서 당황하곤 했다. 그러므로 미생물 사냥은 의사로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므로 그에게는 적격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학 시절에 교수들을 골탕 먹인 염색에 애착을 보였는데 그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물을 염색하여 동물의 생체를 이루는 물질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메틸렌 블루(methylene blue)를 토끼 귀의 정맥에 주사하자 염료는 혈류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면서 이상하게도 신경의 끝만 파랗게 물들였다. 다른 부분은 염색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메틸렌 블루가 통증을 없앨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기대는 어긋났다. 결과적으로 효과 있는 진통제를 발명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생체를 구성하고 있는 수백 가지 조직 중에서 오직 한 종류에만 달려드는 메틸렌 블루의 이상한 성질이 마침내 그로 하여금 마법의 탄환으로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동물의 몸을 이루는 여러 조직 중에서 한 가지만을 염색하는 염료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조직에는 전혀 붙지 않으면서 사람을 공격하는 미생물만을 염색하고 죽이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1901년 마법의 탄환을 찾으려는 연구를 시작한 지 8년이 되던 해 그는 말라리아 병원균을 처음으로 발견한 라브랑의 연구 논문을 읽었다. 라브랑은 지느러미를 가진 트리파노소마가 말들의 뒷다리를 못 쓰게 만들고 쥐에게는 말 드 카데라라는 병을 일으킨다고 적었다. 또한 트리파노소마에 걸린 쥐의 피하에 비소를 주사했더니 트리파노소마를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쥐는 한 마리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에를리히는 원생동물에 의한 질병에는 베링의 혈청 요법이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대안으로 화학요법이 적절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에를리히로 하여금 노벨상을 받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에를리히는 트리파노소마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자신의 특기인 염료를 갖고 미생물 사냥을 시작했다. 그는 매우 근면한 일본인 의사 시가 기요시와 함께 거의 500종류의 염료를 시도했다. 쥐들은 파랗게 물들었다가 노랗게 물들었다가 했지만 지느러미가 달린 트리파노소마는 쥐들의 정맥에서 즐겁게 헤엄치다가 모두 죽였다. 
그런데 어느 날 복잡한 염료인 벤조퍼퓨린(benzopurpurin)을 죽어가는 쥐에게 시험했더니 그 쥐도 말 드 카데라로 죽었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벤조퍼퓨린이 쥐의 몸 속에 충분히 퍼지지 않는 것을 볼 때 만약 염료의 구조를 조금만 바꾼다면 쥐의 혈액에서 더 잘 녹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를리히는 벤조퍼퓨린을 제조하는 공장에 가서 황산기를 하나 붙여 변형시킨 염료(트리판레드)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그의 예상은 성공했고 황산기를 하나 더 붙인 트리판레드 염료를 주사 받은 쥐는 트리파노소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때까지 쥐들을 죽이던 트리파노소마들이 쥐의 혈액 속에서 녹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단 한 마리의 쥐를 살린데 고무된 에를리히는 수많은 지루한 실험을 계속하면서 마법의 탄환을 계속 찾았다. 그런데 한 잡지에서 아톡실(Atosyl, 독이 없다는 뜻)이란 약에 대해서 읽었다. 아톡실은 수면병에 걸린 쥐를 ‘거의’ 치료했다. 반면에 수면병에 걸리지 않은 쥐는 죽였다. 아톡실은 벤젠고리 한 개와 수소원자 네 개, 암모니아 몇 개와 비소 산화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트리판레드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에를리히는 아톡실의 구조를 조금 바꾸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에를리히와 신약의 개발』의 표지, 아닐린색소 응용실험에서 일정한 조직에 대한 일정한 색소의 친화성 상관관계를 밝혔다. ⓒ

결국 그는 벤젠고리와 비소 결합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서 아톡실을 수없이 많은 비소 화합물 속으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즉 수많은 새로운 비소 화합물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1909년 유명한 화합물 606을 만든 것이다. 화합물 606은 디하이드록시디아미노벤젠이란 긴 이름을 갖고 있는데 트리파노소마를 죽이는 효과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단 한 번에 말 드 카데라에 걸린 쥐의 혈액에서 트리파노소마를 깨끗이 없애 버렸다. 
에를리히는 1906년 독일의 동물학자 프리츠 샤우딘(Fritz Schaudinn)이 발견한 손잡이가 없는 나사 모양의 가늘고 희미한 미생물에 대한 논문을 기억했다. 그 미생물의 이름은 스피로헤타 팔리다(Spiroheta oallida)였고 매독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샤우딘은 이 희미한 나선형 균은 동물계에 속해 있지만 세균과도 다른데 트리파노소마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나선형 균이 아마도 가끔씩 트리파노소마로 바뀌는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에를리히는 나선형 균이 말 드 카데라의 원인인 트리파노소마의 사촌이라면 그 나선형 균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에를리히가 생각한 대로였다. 단 한 번의 주사로 나선형 균들은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사라졌다. 바로 마법의 탄환이었다. 
화합물 606호의 개발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원래 606호는 1907년에 만들어졌는데 초기의 실험에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으므로 사장될 운명에 있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났을 때 일본인 하다가 재 실험한 결과 606호는 세균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매독균인 스피로헤타 팔리다 병원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당시 매독에 대한 공포는 현재의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비견될 만큼 악명이 높았으므로 살바르산 606의 명성은 정말로 대단했다. 
물론 에를리히의 연구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것이 매독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알려지자 메치니코프처럼 매독의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병의 일종인 매독은 신세계로부터 유입된 후 300년 동안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매독에 걸린 환자들은 부도덕성에 대한 대가로 정당하게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고 여겼으며 질병이 갖고 있는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에를리히가 매독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예상보다고 강했지만 에를리히는 주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고 드디어 세계를 놀라게 한 606호를 개발한 것이다. 앞에서 약간 설명했지만 그는 특정 염료가 세균 세포는 염색시키지만 사람의 세포는 염색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현상을 보고 그는 세포핵이 생물체 내부에서 특수한 기능을 하며 분자 합성물이라고 가정했다. 
그의 이 가설은 추후에 많이 수정되었지만 에를리히야말로 세포핵이 본질적으로 화학적이라는 가설을 세운 최초의 인물이었다. 에를리히는 이 이론을 계속 발전시켜 독소가 존재하는 곳에서 자연적인 화학적인 화학 반응으로 항체가 생겨난다고 이론화했다. 항체는 보통의 화학적 합성 규칙에 따라 혈류 속에서 독소를 묶고 무력화한다는 그의 이론은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특수한 화합물을 개발하는 것이 환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에를리히는 메치니코프(Elie Metchnikoff)와 함께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아 어렵게 진행한 고생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그의 성공은 모든 질병이 간단히 만들어진 해독제, 즉 마법의 탄환으로 정복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했고, 많은 학자들이 각 질병 또는 종합적인 성능을 갖는 마법의 탄환을 찾는 연구에 착수했다. 
<계속되는 마법의 탄환> 
1930년대에 독일의 생화학자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Johannes Paul Domagk, 1895?1964)가 등장한다. 그는 1895년 독일에서 태어나 의과 대학 재학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야전 병원의 의무병으로 종군하면서 각종 감염성 질환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이 분야를 해결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전쟁 후 의사 자격을 얻은 후 1925년부터 뮌스터 대학교에서 생쥐의 박테리아 감염에 대한 약제로서 새로 만들어낸 일련의 염료를 특정 전염병에 이용할 수 있는지를 에를리히의 화학 요법에 따라 실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7년 바이엘 사에서 그를 주목한 후 연구실 책임자로 영입하겠다고 하자 대학교의 교수직도 함께 갖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했다. 한 마디로 매우 좋은 여건에서 연구할 수 있었는데 그는 바이엘 연구소에서 합성한 염료인 아조 화합물의 약리적 효과에 주목했다. 
결국 바이엘 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도마크는 설폰아미드기를 가진 빨간색 프론토질(prontozil)이라 불리는 염료가 아주 효과적인 항박테리아성 물질임을 발견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왜냐하면 프론토질은 성홍열을 일으키는 연쇄상구균이라 불리는 종류의 박테리아를 공격할 수 있지만 숙주 동물에게는 대량으로 투여해도 아무런 악영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프론토질이 의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시험관 속의 격리된 박테리아는 죽이지 못하고 생체 내에서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도마크는 생체 내에서 프론토질이 다른 물질로 전환되어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항체 효과를 갖는다는 결론을 내었다. 그는 프론토질을 분해하여 효과적인 화합물을 얻었고 그것을 설폰아미드 염료라고 명명했다. 
얼마 후 설폰아미드 염료가 두 부분으로 분해되는데 설폰아미드기 쪽만이 항균제로 유효하다는 것도 발견했다. 또한 이미 알려져 있는 설파닐아미드라고 하는 화합물도 세균성 감염증에 대해 프론토실과 같은 효력이 있었다. 프론토질은 최초의 설파제였고 다른 비슷한 약제들이 뒤이어서 만들어졌다. 세균은 이 약에 차례로 정복되었다(설파제는 잘 녹지 않는 성질 때문에 신장에 남아서 해를 끼치는 단점이 있으므로 근래는 설파제를 투여할 때 세 가지 종류의 설파제를 꼭 유효량이 되도록 복합해서 사용한다). 
도마크는 프론토질의 항균 효과 발견으로 1939년 「프론토질의 항균 효과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통보 받았다. 그러나 도마크는 노벨상을 직접 수상할 수 없었다. 

도마크는 1938년 프랑스, 미국, 영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노벨상 후보로 추천 받았다. 노벨상위원회는 당시 독일인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1932년 언론인인 폰 오시체츠키 때문이다. 그는 1932년 나치가 집권하자 격렬하게 나치당을 공격했다. 나치가 가져 올 국민의 고통과 세계 평화에 대한 절망과 재앙을 예견한 그의 필봉은 히틀러의 감정을 매우 상하게 했다. 그런데 1935년에 노벨 평화상이 폰 오시체츠키에게 수여되자 히틀러는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체포한다. 결국 폰 오시체츠키는 1935년에 감옥에서 죽는다.

▲ 도마크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는데 공식적으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은 6명이다. ⓒ

이것이 빌미가 되어 히틀러는 1937년에 모든 독일인에게 노벨상이 수여되더라도 받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는 1939년 10월 26일 도마크를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국적에 관계없이 수여한다는 노벨의 취지에 따른 만장일치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독일 정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동기가 있다고 의심하였다. 그가 소속한 뮌스터 대학에는 내무부나 홍보부서로부터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때까지 함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도마크는 정부의 지시에 의해 노벨상위원회에 노벨상은 받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스톡홀름을 방문하여 자신의 연구에 대한 강연회에는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 통보받은 10여일 후에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고 1주일 후에 석방되었다. 그 후 도마크는 노벨상을 거절한다는 편지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고 스톡홀름의 강연도 금지 당했다. 도마크는 당시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대신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저녁에 순찰을 도는 간수가 무엇 때문에 체포되었는가 물었다. 그때 나는 노벨상을 받아 갇혔다고 말했다. 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발짝 가서 다른 간수에게 “저 친구 미쳤어. 바로 저 친구 말이야”하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12월 10일, 8년 늦게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도마크에게 상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 규정에 의하여 1년 내에 찾아가지 않는 상금은 회수한다는 규정에 의해 상금은 환수된 후였다. 
예병일은 도마크의 성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첫째, 시대적인 운이 따라 주었다. 실험에 이용한 설폰아미드와 아조 색소는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고 다른 학자들도 이들 재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둘째, 그는 노력파였으며 이타심의 소유자로 쉬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체력이 있었다. 
셋째, 프론토질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바이엘 사와 공동연구의 일환으로 아조 화합물로 세균 염색에 관한 연구를 하던 중 세균용 배지에 떨어진 색소 주위로 세균 증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연해 발견했고 도마크는 이 발견을 놓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염료가 항균 효과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 것으로 파스퇴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한 안목을 갖춘 연구자였다. 
마지막으로 임상 실험이 적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프론토질의 항균력을 발견했을 때 마침 그의 딸이 바늘에 찔린 후 감염되어 패혈증으로까지 발전했는데 그가 발견한 프론토질을 투여하자 놀라운 회복 증세를 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도마크는 마법의 탄환을 발명한 학자들로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여건에서 연구했으며 그에 걸맞는 성과를 거둔 행운의 과학자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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