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 미생물이야기



미생물이야기 황열 바이러스에 대해 살펴보자.
2013-08-14 17:08:04
이엠생명과학연구원

백신 개발의 두 갈래길
 

 ─황열 바이러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카치 위스키 한 상자를 사서 다저스 팀의 야구 경기를 보겠다.> 이 말은 1951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면 그 상금으로 무엇을 하겠냐는 한 기자의 물음에 대해 막스 타일러Max Theiller가 한 대답이다.
  겸손하고 호감이 가는 성품의 타일러는 황열yellow fever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효력이 높은 백신을 개발한 공로로 존경받았다. 이 황열은 급작스레 발병하는 지독한 병으로 잇몸 출혈과 경련을 일으키고, 구토에 피가 섞여 나오면서 황달 증세가 나타난다. 이 <황열>은 타일러에게는 명성과 영예를 안겨주었고, 다른 연구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에게는 비통한 실패를 가져다 주었다. 노구치는 이 질병을 유발하는 미생물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길을 밟아 결국 황열에 굴복하고 말았다─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할복했다고 한다.


  황열 백신의 필요성은 1869년 수에즈 운하는 완성하였으나 파나마 운하 건설에는 실패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의 일화에서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세나 날씨 혹은 자본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일꾼들을 강타한 황열 때문에 실패했던 것이다. 비록 이 운하가 나중에 바이러스를 옮기는 모기들을 방제함으로써 결국 건설되기는 했지만, 황열을 이기는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인 해결책은 면역임이 분명했다.


  수의(獸醫)세균학자 아놀드 타일러Arnold Theiller 경의 막내 아들인 막스 타일러는 1899년 남아프리타 프레토리아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락교에서 의예과 과정을 마친 후 1919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주는 20파운드의 용돈으로 가능한 모든 시간을 화랑에 가거나 연극을 보거나 입센, 체스터톤, 쇼, 웰즈의 책을 읽는 데 보냈다.


  막스 타일러가 미생물학에 대해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런던의 위생 및 열대 의과대학에서 대학원을 수료하는 과정에서였다. 『쥐, 이 그리고 역사』를 집필한 미국 세균학자 한스 진저의 『감염과 저항Infection and Resistance』을 읽으면서 그의 열정에 불이 붙었다. 이후 얼마 안 되어 데일러에게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직 제안이 왔고 1922년에 이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역시 그 무렵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된 진저와 친분을 맺기 시작했다. 금주령이 내려진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곧 집에서 양조법을 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타일러는 황열의 원인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하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뉴욕 록펠러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노구치 히데요는 황열의 원인체가 매독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코르크 때개 모양의 세균인 스피로헤타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타일러는 그가 실험용 쥐에 접종한 바이러스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타일러가 1930년 《사이언스》에 이 연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을 때, 다른 과학자들은 타일러의 결론에 의문을 나타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두 가지 핵심적인 발견을 해놓은 때였다(더구나 자신을 공격한 이 질병을 물리치기도 했다). 우선 그는 황열을 이겨낸 사람의 혈청이 바이러스를 비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황열에 걸렸던 사람의 항체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두번째로 그는 쥐에서 증식한 바이러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원숭이에 병을 일으킬 정도로 약화 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다른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 때, 뉴욕 록펠러 재단의 윌버 소여Wilbur Sawyer는 이 발견에 깊은 인상을 받고 타일러에게 두 배의 급여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새로운 자리를 주어 불러들였다. 곧 이 재단은 타일러의 <활성 테스트>를 이용하여 감염자를 확인하는 식으로 당시 세계의 황열 분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타일러는 바이러스의 약독화에 대한 결과를 이용하여 백신 개발에 들어갔다. 그는 실험동물이 아닌 조직 배양으로 바이러스를 증식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면역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약화된 바이러스 균주를 만들려고 했다. 3년간 수천 번의 조직 배양을 시도한 끝에 17D라는 번호표가 붙은 플라스크에, 《영국 의학》에 <최근 개발한 가장 성능이 우수하고 안전한 바이러스 백신>이라고 설명한, 백신을 만들 수 있는 바이러스를 증식할 수 있었다. 1936년에 타일러는 이 바이러스를 자신에게 접종하고 자신의 몸 속에서 늘어나는 항체 수준을 측정하였다. 1940년 무렵에는 임상 실험에서 마무리되었고, 다시 7년이 지난 후에는 록펠러 재단에서 2,800만 번 투약할 수 있을 만큼의 백신을 제조했다.


  타일러의 백신은 19세기 말엽 황열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모기의 방제 대책과 발맞추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카브리해 전역에서 유행하던 황열의 전파를 저지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모기 방제 대책이 축소되고 집단 백신 접종도 줄고 있다. 그렇다고 백신이 가져온 쾌거가 다시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백신의 성공도와 지속적인 경계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노구치 히데요가 황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매독의 원인인 스피로헤타를 최초로 배양하는 데 성곡하고, 트라코마와 쓰쓰가무시병을 상당한 정도로 이해하는 등의 몇 가지 주요 전환을 이루었을 때였다. 그러나 황열은 그를 실패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는 스스로 황열의 원인이라고 믿은 스피로헤타 종 하나를 분리하여 그에 맞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고는 모르모트에 주입했다. 확실히 황열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냈다.


  그러나 타일러는 노구치의 스피로헤타는 사실 매우 다른 종류의 질병, 득 바일병Weil's disease이라고 알려진 황달의 원인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구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록펠러 재단 팀이 열대 지방의 황열 환자에게 그가 주장하는 스피로헤타를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 황금 해안(아프리카 가나의 지명)에 거주하던 아드리안 스톡스Adrian Stokes가 바이러스까지는 아니지만 박테리아는 거를 수 있는 세밀한 필터를 통과한 물질을 이용하여 황열을 원숭이에게 옮기는 데 성공하고 난 후에, 노구치는 자신의 견해를 다시금 확신하였다. 스톡스는 자신의 실험을 선보인 직후인 1927년 9월, 황열에 걸려 죽었다. 이듬해 노구치는 <성공 아니면 죽음>이라며 뉴욕을 떠나 아크라로 향했다. 수개월 동안 그는 황열의 혈액 시료를 철저히 검사하여 자신의 스피로헤타 검증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실패했고 진짜 병원체인 황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타일러는 노벨상을 탔다. 노구치 역시 황열이 세균에 의한 것이라는 초기 연구로 노벨상을 받을 뻔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된 연구 결과를 확신하면서 명예의 길에서 비껴갔다. 그가 마지막 죽음의 침상에서 남긴 말은 <난 이해할 수 없다>로 기록되어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 KAIST문지캠퍼스강의동L605호 대표이사:(원장)서범구 사업자번호:314-86-01479
전화번호:1800-0250 팩스번호:07074559748 관리자이메일:puom9@naver.com
이엠생명과학연구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