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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이야기 에를리히Paul Ehrlich
2013-08-19 09:42:08
이엠생명과학연구원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 3. 14 프로이센 슐레지엔 슈트렐런~1915. 8. 20 독일 바트홈부르크.

독일의 의학자.

혈액학·면역학·화학요법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했고, 처음으로 매독의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견했다. 1908년 일리야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초기생애

에를리히는 사업과 경영으로 유명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실험화학과 응용세균학에 대해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라이프치히대학교의 의학도로서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체내의 이물질 분포에 대한 글을 썼으며, 이전에 색분석에서 발견된 것을 이용하여 치료과정과 중독과정에 작용하는 화학적 메커니즘이 세포의 영양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연구의 결과로 에를리히는 유명한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에 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발견한 결핵균의 새로운 염색법을 개발했다. 이것은 현미경을 이용한 결핵진단법에 있어서 결정적인 진보였음이 입증되었다. 한편 그는 살아 있는 조직을 염색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면서, 신경성 질환치료에 메틸렌블루를 사용하면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외에도 진단학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는데, 티푸스 환자의 소변에서 특정 화학반응을 추적했고 열을 내리기 위해 다양한 투약법을 시험해보았으며, 안구 질병치료에 유용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에를리히가 1879~83년에 출판한 37편의 과학논문 중에 스스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마지막에 출판한〈유기체의 산소 요구 The Requirement of the Organism for Oxygen〉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산소소비량은 조직의 유형에 따라 다르며 이러한 차이로 세포의 생명유지 과정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학설을 확립했다. 1883년 헤트비히 핀쿠스와 결혼하여 2명의 딸을 낳았다.

 

 

면역과 측쇄설

결핵을 앓는 동안 에를리히는 연구를 중단하고 치료를 위해 이집트로 갔다. 1889년 병이 완치되어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작고 소박한 개인연구실에서 연구한 후에 코흐 전염병연구소로 옮겨 면역문제에 몰두했다. 그 당시에는 세균이 어떤 방식으로 질병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고 신체의 방어체제나 치료효과 조차도 알지 못했다. 에를리히가 개발하고 발전시킨 가설은 측쇄설인데, 이 가설에 따르면 각 세포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중심과 영양물질이나 특정한 독성물질을 흡수하거나 동화하는 일련의 측쇄 또는 수용기를 가지고 있다. 독성을 가진 분자는 세포의 측쇄와 결합해야만 비로소 세포에 작용할 수 있다. 감염된 유기체는 다량의 측쇄를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독성물질과 결합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면역체는 새로운 감염을 막아서 유기체는 능동적인 면역이 생긴다.

 

이 가설은 각 측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특히 에를리히의 후기 연구와 후계자들의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에를리히는 실험을 통해 토끼에게 독성물질을 점차적으로 양을 늘려 투여했을 때 치사량의 5,000배까지 되는 농도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는 면역의 정확한 정량적 형태를 입증했다. 이러한 발견은 1890년 디프테리아에 대한 항독소를 만드는 데 성공한 에밀 폰 베링을 만남으로써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베링은 임상진료에 사용할 수 있는 혈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항독효과가 가장 좋은 혈청을 만들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말의 피를 이용하는 에를리히의 기술을 채택해야만 했다. 에를리히는 혈청의 효용성을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이 방법은 곧 세계 전역에서 디프테리아 혈청의 표준화에 채택되었다.

이러한 업적에 기초하여 에를리히는 베를린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는데, 이 연구소는 1899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이전하여 왕립실험치료연구소가 되었다. 그는 연구를 하는 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고, 이런 상황이 에를리히 자신의 재능이나 성향에 부합되었던 반면에 동료가 면역학과 혈청요법의 전문가가 되길 원했던 베링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성격차이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금전적인 보상에 완전히 무관심했던 에를리히는 베링과 같은 사업가가 되려는 야심이 전혀 없었으며, 실험실에서 연구와 학습을 하는 데 만족했다. 에를리히는 당시의 혈청요법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전염성 질환, 특히 원생동물이 일으키는 질환은 혈청 치료로는 효과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 화학요법이 탄생했다. 에를리히는 유기체에 해를 입히지 않고 기생생물을 죽이거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아내어 분류하고 합성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원생동물의 일종인 트리파노소마(trypanosomes)를 콜타르 염색으로 제어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 다음으로 비소와 벤젠 화합물을 다루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다른 화합물들은 너무 독성이 강했다. 그는 이런 어려움에 봉착해 실패했다고 인정하면서, 매독을 일으키는 유기체 스피로헤타인 트레포네마 팔리둠(Treponema pallidum)으로 관심을 돌렸다.

 

 

매독 연구

그는 당시 상당한 연구자금과 그가 주관하는 연구소를 몇 개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매우 유능한 연구원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동료인 사하치로 하타는 에를리히가 결국 매독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도록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만든 606제제는 나중에는 살바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비소가 다량 함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효과적이고 무해한 것이었다. 1910년 봄에 한 첫번째 시험으로 다양한 종류의 병을 치료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매독과 유사한 열대성 질병인 딸기종의 경우에는 단 1차례의 주사로 충분했다. 에를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로 '마법의 탄환'이 발견된 것처럼 보였다.

매독으로 황폐해졌던 세계 전역에서 곧 이 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방법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에를리히는 비소 제제의 경우에 일반적인 몇 백 번의 임상시험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투여할 경우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를리히와 긴밀하게 공동연구를 해왔던 생산업자인 파르베르케 회히스트는 총 6만 5,000 단위를 무료로 세계 전역의 의사에게 방출했다. 해로운 부작용의 숫자는 무시할 정도였으나 에를리히를 시기하는 몇몇 경쟁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공격했다. 결국 가장 심하게 중상비방하는 사람을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비방자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그에게 수여한 가장 큰 명예는 '우수한'(Exzellenz)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추밀고문관'(Wirklicher Geheimer Rat)이었다. 에를리히는 옥스퍼드·시카고·아테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가 설립한 연구소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명예시민권을 받는 등 다른 많은 명예를 안았다.

에를리히는 1914년 12월 첫번째 뇌일혈을 앓고 난 후, 다음해 8월 2번째 뇌일혈로 죽었다. 런던〈타임스 The Times〉의 사망기사는 에를리히의 업적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인정하면서 "전세계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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